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초강수로 돌아섰다. 기존 방식으로는 북한의 핵 야망을 꺾을 수 없다며 ‘핵개발이 체제붕괴를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는’ 전방위 제재 카드를 꺼내 들었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유도하기 위해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이라는 최후카드까지 던졌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끝장 결의(terminating resolution)’를 얻어내고 주요국들이 양자 차원에서도 대북제재에 동참토록 총력외교에 안간힘이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 동북아평화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 박근혜외교의 현란한 3대 키워드와 ‘통일대박’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북한 핵에 대한 대통령의 초강수는 이란의 모델을 참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란 핵협상이 성공한 배경에는 이란의 핵무장을 저지해야 한다는 강대국의 일치된 이해관계, 미국의 적극적 관여, 그리고 핵 대신 경제를 선택해야 한다는 이란 내부의 국민적 의지가 뒷받침됐다.
이란과 달리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중동과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간 게임의 법칙도 다르다. 북한은 이란보다 경제규모가 훨씬 작고 중국에 대한 의존도는 너무 크다. 중국은 미중 대결구도에서 북한을 전략적 자산으로 여겨 강도 높은 대북제재에는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미국의 ‘전략적 인내’ 도 북핵문제의 근원적 해결에 큰 걸림돌이다.
현실적으로 개성공단의 문을 닫는다고 김정은이 당장 핵과 미사일을 버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남북 사이의 모든 통신선이 끊어지고 사소한 충돌이 국지전 또는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북 끝장 제재의 성패를 쥐고 있는 중국이 연일 한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 결정에 ‘결연한 반대’를 표명하면서 국제사회의 제재는 뒷전으로 밀리고 미-중, 한-중 간 사드 갈등만 증폭되고 있다.
미국의 대북제재강화법에 따라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을 ‘돈세탁 우려국’으로 지정해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은행을 제재하고, 북한과 광물을 거래하는 중국 기업들의 자산 동결 등의 조치에 나서면 중국이 견뎌내기 어려울 것으로 우리 정부는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미국 역시 중국과의 경제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부담이 만만치 않다.
사드 배치가 결정되면 한중 관계는 ‘최상의 관계’에서 수교 이래 최악으로 곤두박질 칠 판이다. 한중 관계가 악화되면 중국 기업들이 한국과의 무역·투자를 알아서 축소하고 중국 관광객들도 ‘한국여행 자제’ 내부지침 하나만으로 발길을 돌리는 등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과 러시아는 사드 배치를 한 미 일이 반중·반러 군사동맹 체제를 구조적으로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해 앞으로 무역, 북핵,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통일 등 핵심 경제 및 안보 사안에서 이들의 우호적인 협력을 얻기가 어려워질 우려가 크다.
사드 배치문제가 제재에 동참해야 할 나라들을 자극하고, 이에 따른 남남 갈등과 주변 국가들과의 마찰은 제재 효과를 반감시킬 수밖에 없다. 한미일 3국의 잇단 대북 제재 조치 발표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외부 투자가들이 한반도 정세를 관찰하는 주요 바로미터가 완충지대 개성공단의 유지 여부였다. 공단이 유지되는 한 남북 간 긴장관계가 본격적 무력충돌로 번질 가능성은 낮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가 신인도가 그만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증유의 복합적 안보위기를 극복하려면 박근혜정부는 안보 정책 실패부터 진솔하게 되돌아 보아야한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말하면서 전제조건인 한반도 비핵화를 어떻게 달성할지, 남북 간 신뢰를 어떻게 형성할지 실천적 전략은 없었다.
표현만 요란한 정책들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은 이면에는 북한정권의 붕괴를 기다리면서 흡수 통일하겠다는 의도 때문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대북정책은 외교정책이 아니고 국내 지지기반과 표를 의식한 ‘국내정책’이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북한이 핵에 집착하는 이유는 핵이 그들 체제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핵은 미국에게는 비확산의 문제지만 북한엔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 문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 카다피의 처참한 말로를 본 왕조체제 북한의 리더십이 핵을 포기하면 적극적인 경제지원을 하겠다는 미국이나 우리 측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잃을 게 없는 자가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들면 정말 방법이 없다”는 중국 속담까지 들먹였다고 전해진다.
북한을 지나치게 압박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고,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없어질 경우 한반도가 중국을 봉쇄, 압박하는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는 게 중국의 전략적 속내다.
헨리 키신저는 한반도 문제는 미·중의 아태 지역 전략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으며 북핵 문제는 동북아의 ‘합의된 평화질서(agreed peaceful order)’라는 큰 구도 아래서 해결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도 동북아와 한반도의 장기적인 평화질서를 만들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공존과 상생의 정신이 필수적이다.
북한붕괴론이 북핵 해결의 현실적 접근을 막아왔음은 부인키 어렵다. 북한 핵은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북핵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이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방안을 남북관계와 통일을 내다보며 모색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박근혜 정부의 남은 2년은 한반도의 명운이 바뀔 수 있는 중요한 시기다. 달라진 안보 상황에 맞게 대북정책의 틀을 다시 짜야한다. 대북제재는 일방적일 수 없다. 북한에 고통을 주는 만큼 우리도 고통과 위험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정부 및 민간차원에서 논의의 장(場)을 만들고 집단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유엔 안보리 제재가 설사 우리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중국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한다. 사드배치의 필요성을 대내외적으로 설득시키고 중국관계를 잘 관리해야한다.
단기적으로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거나 핵미사일을 탑재한 전략잠수함을 한국에 상시 배치하는 등의 대안을 통해 중국이나 러시아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대북 핵 억지력을 갖추는 것이 현명하다.
북핵문제의 근원적 해법은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와 화해협력이다. 남과 북이 진정한 상호공존과 공동번영 의지를 가지고 관계를 정상화하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한·미·중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보장해 주는 방향으로 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동시에 타결시키는 길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전략적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