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를 구성할 4․13총선이 내주로 다가왔다.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번에 본 떼를 보여주자'고 단단히 벼를 법도 하지만 일여다야(一與多野)와 일부 여권분열 등 어지러운 선거구도속에 유권자의 선택 또한 혼란스럽다.
막장드라마 같은 공천파동을 지켜 본 유권자들은 패권정치에 낙담해 충성도가 높은 여야 지지자들조차 “투표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선거를 외면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공천다툼에 매몰되면서 인물과 정책 정보가 실종돼 “내가 사는 지역에 누가 나오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푸념도 쏟아진다. “정치가 사람들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어 쳐다보기도 싫다”는 극도의 정치피로 내지 정치혐오 현상도 두드러진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은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어내는 선거프레임으로 상대를 심판해 달라는 3당3색 심판론을 꺼내들었다.
새누리당은 민생법안 처리에 반대해온 야당을 심판해 달라고 호소하고, 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정부와 여당의 실정(失政) 때문에 경제난이 심각해졌다며 지난 8년간 새누리당 정권의 경제 무능을 심판해달라고 맞불을 놓고 있다. 국민의당은 “문제를 풀어야 할 정치가 오히려 문제를 만들고 있다”며 거대 양당이 기득권화 된 낡은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나섰다.
심판의 주체인 유권자 입장에서 3당의 심판론은 전형적인 남 탓이자 책임 떠넘기기다. 야당이 쟁점법안을 제 때 통과시켜주지 않아 국정에 발목을 잡았음은 국민들은 다 안다. 그렇다고 그 책임을 모두 야당에 돌리고 이들을 표로 심판해달라는 것은 낯 두꺼운 행위다.
야당 심판론에 앞서 과반이 넘는 의석을 가진 거대여당으로서의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쟁점법안들의 통과를 위해 거대여당은 과연 얼마만큼 대화와 설득의 노력을 기울였던가. 법안통과만 되면 경제가 살 판 날 것처럼 믿고 이를 밀어붙이려는 독선과 오만은 없었던가.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며 이를 무력화할 수 있는 3분의 2 의석이 필요하다는 여당의 호소는 정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몰염치한 행위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제심판론도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새누리당 집권 8년 동안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 확대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는 세계적 저성장과 경쟁격화, 주력산업의 지각변동 등 구조적 요인에 따른 것으로 전적으로 박근혜 정부 3년의 실정 탓만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여야 입장을 떠나 새로운 먹거리 산업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과연 얼마나 했는가.
국민의당은 이번 선거를 “오만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을 심판하는 선거, 무능한 야당을 대체하는 선거”로 규정하고 제3당이 등장하면 정치에 경쟁이 도입돼 민생을 챙기게 된 다고 유권자에게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공천 과정에서 기존 두 정당을 뺨치는 잡음, 특정지역 맹주 다툼 등 구태 정치는 낡은 정치 심판론을 스스로 무색케 하고 있다.
유권자의 표심을 얻으려면 남 탓보다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상대방보다 잘하겠다는 것이 중요하다. 4개 정당이 내놓은 20대 총선 공약은 구체적 재원마련과 실행계획 부재, 숫자 부풀리기, 과거정책의 재탕․삼탕, 포퓰리즘 투성이다.
기업 U턴과 관광 활성화로 일자리 200만개를 만들겠다는 새누리의 공약은 기존 정책의 재활용이다. '한국적 양적완화' 공약은 그 한계와 부작용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급조된 인상이다. 국채를 중앙은행이 전량 매입해 마치 하늘에서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듯 통화를 공급하면 우리 경제가 나아질까.
선진국들이 양적완화로 돈을 뿌려도 투자와 소비가 늘지 않고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은 기업과 국민 등 경제주체가 미래 경제상황을 낙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자리 개혁, 청년의 주거·재정독립지원, 40∼50대 재교육, 임신·출산·육아문제를 지원하는 마더센터, 갑·을 간 불평등·불공정 관계 청산 등 5대 핵심공약을 2017년 5월31일까지 완수 못하면 1년 치 세비를 반납한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후보들에게 쓰게 한다는 황당한 공약도 등장했다.
더민주는 기초연금 30만원 상향, 청년할당제를 통한 일자리 70만개 창출, 국민연금의 공공분야 투자 등 실현되기 어려운 공약을 쏟아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해 '더불어 성장론', '포용적 성장론'을 내걸었지만 구체적인 각론은 보이지 않는다. 청년수당 공약은 일자리 창출 효과보다는 복지대책 수준이다. '4월 13일은 털린 지갑을 되찾는 날'이라는 슬로건 또한 포퓰리즘 냄새가 짙다.
정의당을 포함해 4대 주요 정당이 만들겠다는 일자리만 앞으로 5년 동안 1100만 개가 넘는다. 한 해 200만 개가 넘는 셈이다. 지난해 새로 생긴 일자리는 33만 여개에 불과했다. '아니면 말고'식 공약의 표본이다.
대선과는 달리 전국을 아우르는 정책공약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총선이라 해도 중장기 구조적 해법에 대한 고민 없이 실행 불가능한 대책들을 나열한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
정당 지도부는 정책보다는 패권 장악에만 집착하고, 공천 아닌 권력자의 사천(私薦) 때문에 권력자를 추종만 하면 살 길이 보장되는데 정책개발을 위해 머리를 싸맬 이유가 없다.
기존 정당의 독과점 구도 속에서 후보자를 누구로 내세우던 그저 정당만 보고 선택하라는 뻔뻔스런 자세다. 때문에 선거 때마다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후보들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당선된 후보는 온갖 특혜와 특전을 챙기며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그들만의 잔치'가 되풀이된다. 계파이익과 차기당선이 우선이고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의 변화와 혁신은 말 뿐이다. 자신들만의 생존에 몰두하면서 선거 때만 반짝 국고보조금과 후원금에 의지해 활동하는 '선거머신'으로 추락하고 있다.
이슈와 비전은 실종되고 선거전은 흥미위주의 판세 읽기와 경마 식 여론지지율 다툼으로 흥행을 노린다. 폐쇄적인 진영논리 속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사라지고 오로지 누가 이기고 지느냐, 어느 쪽이 몇 석을 얻느냐에 목을 맨다.
공천만 되면 당선이 보장된다는 '영남 텃밭'과 '호남 안방' 지역구가 전체의 3분의 1 가까운 93석, 여야 내부 균열 등으로 영호남 20여 곳의 판세가 요동친다지만, 나머지 70곳 안팎에선 당선자가 처음부터 정해진 셈이다. 수도권 122곳 중 104곳이 여당 후보 하나에 야당 후보가 둘 이상인 '1여다야'구도여서 야권연대에 의한 후보단일화가 막판의 변수다.
새로운 이슈나 인물, 시대정신은 보이지 않고 여야 할 것 없이 총선 이후 당권 대권 주도권 다툼만 생각하는 우리의 정치권에서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선거축제'는커녕 요란한 로고송과 색깔 옷 입은 운동원들의 율동을 지켜보는 유권자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