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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인생역정] ①

흙수저에서 대통령후보로…깡촌에서 희망을 품다

조세일보 | 조문정 기자 2021.10.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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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공' 이재명 "'굽은 팔'은 인생의 전환점"… 대권주자 이재명, '대장동 의혹' 넘을까?

생일날짜도 몰랐던 '흙수저 소년', 깡촌에서 희망을… "'크게 된다'는 점바치 말을 '암시'로"

'무명(無名)' 소년공, '굽은 팔' 위기를 기회로… "굽어버린 팔이 결국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두 번의 자살시도… "어느 것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흙수저도 못 되는 무수저의 삶이다"

주경야독 끝에 학력고사 285점으로 중앙대 장학생 … "압정 놓고 공부해 참고서가 피범벅 됐다"

◆'소년공' 이재명 "'굽은 팔'은 인생의 전환점"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이재명 경기지사(이하 이재명 후보)는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에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언급하며 "국회의원 경력 한번 없는 변방의 아웃사이더"라고 몸을 낮췄다. 그는 "중·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어린 나이 때문에 제 이름으로는 공장 취직도 할 수 없었다. 프레스에 눌려 팔이 휘어지고, 독한 약품에 후각을 절반 이상 잃어버린 장애 소년 노동자이다. 정치적 후광도, 조직도 학연도 지연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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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검정고시 수험표 사진.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흙수저도 못 되는 '무(無)수저'의 삶"을 살았다는 이재명 후보에게 성남은 제2의 고향이다. 교복 대신 작업복을 입고 팔이 굽는 부상을 입었으며,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10대 소년이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 나아가 정치인으로 성장한 곳이 성남이다.

'굽은 팔' 소년은 어른이 돼서도 숱한 위기를 겪었다. 음주운전 사건, 2002년 방송사 PD가 당시 김병량 성남시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검사를 사칭해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은 '검사사칭' 사건, '형수 욕설 사건' 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TV토론회에서는 '친형을 강제입원 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허위발언으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를 받았으나 상고심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신출귀몰하게 기사회생한 이재명 후보의 인생사는 흡사 한 편의 리얼리티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다.
 
◆생일날짜도 몰랐던, 칠남매 중 다섯째 '흙수저 소년', 깡촌에서도 희망을 품다
이재명 후보는 1963년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돈촌동 지통마을이라는 깡촌 산골짜기에서 일곱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머니조차 정확한 생일을 모를 정도로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 후보는 2006년 출간한 회고록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서 "(어머니가) 애를 하도 많이 낳아 헷갈려서 그런지, 아니면 어머님 표현대로 고생에 뼛골이 빠지다 보니 정신이 없어져서 그런지 어머니는 유독 다섯째인 나의 생일이 (음력) 22일인지, 23일인지 기억하지 못하시어 내가 어릴 적에 '점바치(점쟁이)'에게 며칠인지를 물어보았다고 알려주었다"라고 회상했다.

점바치는 음력 23일이라는 생일을 정해주며 어머니에게 '이 애는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처음 어머니에게 '점바치' 얘기를 들은 소년은 어머니가 '밭'에 가서 말씀을 들었다는 얘기인 줄 알고 "'밭'이 나를 지켜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9월 26일 SBS '집사부일체'에 출연해 "어머니가 점쟁이한테 물어봤는데 '네가 분명히 대성한다더라, 너를 잘 키우면 호강한다더라'고 얘기하더라"며 "'너 크게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셨다, 저도 그 말을 암시로 듣고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뭐가 될 거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도전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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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에서 다시 모인 이재명의 가족. 뒷줄 오른쪽부터 누나(재순)와 어머니, 앞줄 가운데가 여동생(재옥).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인 1977년 음력 2월 29일, 그의 가족은 몇 년 만에 아버지의 부름에 따라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했다. 그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친구들과 달리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고향 친구들을 떠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소년공 생활에 이어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를 치러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하고, 사법시험을 패스하는 인생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무명(無名)' 소년공, '굽은 팔'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굽어버린 팔이 결국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온 가족이 '돈벌이'에 나섰다. 상대원 시장에서 아버지는 청소부로 일했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변소(화장실)에서 이용료를 받는 일을 했다. 어린 이 후보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소년공 생활을 했는데, 그땐 소년공 생활이 6년이나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소년공의 첫 번째 일터는 이름 모를 목걸이 공장이었다. 염산을 다루고 납 증기를 들이마시며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했지만, 사장이 석 달 치 월급을 떼어먹고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두 번째 공장인 '동마고우'에서는 동네 형 '박승원'의 이름을 빌려 일했다. 손가락이 벨트로 말려 들어가는 산재를 당했지만, 치료비는 물론이고 휴직기간 월급도 한 푼 받지 못했다. 세 번째 공장인 '아주냉동'에서는 냉장고에 들어가는 함석을 가위로 자르느라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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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공장 동료들과의 야유회(앞줄 오른쪽이 이재명).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네 번째 공장인 '대양실업'에선 야구 글러브용 가죽을 재단하는 기능공으로 일하다 손목이 프레스에 눌려 부러졌다. 그는 타박상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병원에 가보라는 사람도 없어 치료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장애를 얻었다. 아픈 팔에도 쉴 수 없어 1979년 '오리엔트' 공장에 입사했다. 여전히 나이가 어려 고향 동창의 주민등록등본을 몰래 떼어 위장취업 했다. 열여섯 살 무렵 키가 15cm 자라면서 팔이 굽게 됐다. 부러진 뼈가 다른 뼈의 성장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팔이 비틀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장애 6급 판정을 받고 병역을 면제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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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이재명의 굽은 팔' 출판 기념회에서 팔을 내보이고 있는 이재명 후보.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소년은 굽은 팔 때문에 차려 자세를 싫어했지만, 이때를 돌아보며 굽은 팔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돌이켜보면 손목뼈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방치했다가 굽어버린 팔이 결국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내 굽은 팔은 소년공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자 공부에 매달리도록 했고, 법을 공부해 노동자를 위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시절의 일기장을 통해 세상과 이야기하도록 했다. 비록 내 팔은 굽었지만, 세상이 또 다른 굽은 팔을 만들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굽은 세상을 곧게 펴고 싶었다. 나의 왼팔은 지금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굽은 세상을 펼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말이다"라고 밝혔다.

어린 시절, 늘 암울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온 가족이 돈벌이에 나선 덕분에 그의 가족은 성남살이 4년만인 1981년 월세방에서 탈출해 200만원짜리 전셋집을 얻게 된다.
 
◆두 번의 자살시도… "어느 것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흙수저도 못 되는 무수저의 삶이다"
이 후보의 집념과 의지는 소위 '깡'으로 표현할 만하다. 국민의힘 유력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9월 19일 SBS 집사부일체에 출연해 이 후보에게 배우고 싶은 점으로 깡을 꼽았을 정도.

이 후보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삶에 들이닥친 문제 중 어느 것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흙수저도 못 되는 무수저의 삶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좌절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깡으로 헉헉 숨을 몰아치며 자전거 페달을 밟아 상대원 고갯길을 오르듯 하다 보면, 극한의 고통 끝에 새로운 길이 희미하게나마 빼꼼 열리곤 했다. 그렇게 한 고개를 넘고 나면 또 다른 고갯길의 연속이다. 밀려오는 좌절감을 뒤로 한 채 다시 페달을 밟는 것 외에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깡'으로 살았지만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삶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나의 청소년기는 교복을 입지 못한 상처로 얼룩져 있다. 학교 대신 공장에 다녔고, 교복이 아닌 작업복을 입었기 때문이다"라고 털어놨다.

1980년 열일곱 이재명은 오리엔트 공장을 그만두고 열심히 공부해 우수한 성적으로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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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7월 26일 이재명의 일기.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그러나 작업복을 입고 아버지를 따라 새벽 쓰레기 청소를 해야 했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인생을 비관하며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의 말대로 삶은 완전한 좌절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첫 번째 시도에선 연탄불이 어이없이 꺼져 실패했고, 두 번째 시도에선 약국에서 산 수면제가 알고 보니 소화제였고 매형에게 자살기도를 들켜 실패했다.

그는 1980년 7월 11일 일기에 "죽음이 이렇게 어려운가. 죽었으면 편할 것을. 이 일은 매형만이 알 것이다. 차라리 집안 식구가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적었다.
 
◆주경야독 끝에 학력고사 285점으로 중앙대 법대 장학생으로
그는 1981년 3월 서울 신답동의 삼영학원 야간 입시반과 상대원 고개의 인현독서실에 등록해 '주경야독'을 시작한다. 8시 30분에 공장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일하고, 7시부터 학원수업을 듣고 12시부터 통금이 해제하는 새벽 4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귀가하는 초인적인 수험생활을 했다. 7월에는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공장을 퇴사하고 삼영학원 주간반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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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대입 학력고사 수험표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그는 SBS 집사부일체에서 자신의 수험생활에 대해 "(대입 시험에서) 전국 3500등 이내에 들면 등록금을 면제하고 생활비 20만원을 준다는 공지를 보고 공부해서 대학 가자고 생각했다"라며 "그런데 공장 다니고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까 학원 다녀와서 독서실로 가 안 졸기 위해 압정을 테이프로 책상에 붙여서 졸면 바로 피를 보게 했다, 졸다가 찔리면 잠에서 깼는데 그래서 제 참고서에 피가 많이 묻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피땀 눈물'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1982년 학력고사 285점을 받고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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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장학증서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그는 "그해 난이도를 생각하면 상당히 좋은 점수였다. 서울대 법대 예상 컷트라인이 꼭 285점까지였다. 나는 딱 한 군데 대학에만 원서를 냈다. 등록금 면제에 매월 학비 보조금 20만원 지원이라는 훌륭한 장학제도를 갖춘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월급 7만원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던 그에게 출세도 이런 출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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