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은 신(神)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을 빗대어 말할 때 곧잘 인용된다.
경제력에 있어 격차가 심한 16개 국가를 유로라는 하나의 단일통화로 묶은 유로존(Eurozone)은 근대 인류역사상 가장 야심적 프로젝트로 꼽힌다.
50개 주(洲)를 하나로 묶은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은 인류이상(理想)의 한 실현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각양각색의 인종들을 법과 연방제도로 묶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유로존은 16개 국가들의 통화동맹이자 유럽연합(EU) 27개국들을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으로 묶는 연결고리다. 그 규모나 내용 양면에서 미합중국을 능가하는 대실험이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으로 유로화 도입이 결정될 때만해도 전문가들 간에 회의론이 적지 않았다. 단일통화는 회원국들 간의 생산력 및 경제효율 간의 격차를 좁혀주기는 커녕 증폭시킬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다.
어느 한 회원국이 허용된 것보다 큰 적자를 낼 경우 전체시스템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영국이 유로존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도 이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든 유로존은 부푼 기대를 안고 1999년 11개 국가로 공식 출범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고정환율제가 무너진 후 유럽을 괴롭혀왔던 환율불안이 가셨고, 환전불편이 사라진데다 회원국 간 가격이 투명해지면서 역내교역도 크게 늘었다.
과다한 부채에 시달리던 회원국들은 독일 스타일의 낮은 인플레와 저금리의 '단맛'을 알게 됐고, 독일 역시 유로화가 그들의 초강세통화 마르크에 비해서는 약세를 보일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었다.
프랑스는 통일독일이 '제4제국'이 되지 않게 하려면 단일통화체제 속에 묶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미국 달러화제국에 도전하는 대체 준비통화로서 유럽단일통화는 절묘한 대안이라는 국제정치적 계산들도 작용했다.
유로화는 달러화와 거의 1대1로 대등하게 출발했으나 가치가 줄곧 오르며 유로당 1.6달러대까지 치솟았다. 달러화 신인도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유로화 유통량이 가액으로 달러유통량을 넘어섰다는 계산들이 나오고, 범죄영화에서 범인들이 노리는 돈다발도 왕년의 100달러 지폐에서 500유로 지폐다발로 바뀌었다.
2001년 그리스의 12번째 유로존 가입은 그리스에게 '축복'으로 받아들여졌다. 높은 인플레와 통화가치불안에 시달리던 그리스 경제가 보다 절제되고 틀이 잘 잡힌 경제들에 안정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된 것이 당장의 혜택이었다. 가입당시 그리스의 가계 빚은 국내총생산(GDP)의 6%에 불과했다. 2009년에 근 50%로 폭증했다. 2009년 말 현재 정부채무는 GDP의 115%다.
유로존의 가장 큰 결점은 통화만 유로화로 단일화했을 뿐 재정정책은 조정되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둔 점이다. 재정적자는 GDP의 3%, 공공채무는 60%를 넘지 않도록 하는 권고기준이 있을 뿐 강제력이 없다.
지난해 9월 새로 선출된 그리스정부는 재정적자가 전임정부가 보고한 GDP의 6%가 아니라 12.7%라고 실토했다. 2009년 연초 유럽집행위원회에 약속한 3.7%의 3배 수준이다. 재정적자폭을 대외적으로 속였다는 얘기다.
게다가 유럽중앙은행(ECB)은 구제금융 금지 규정을 어기고 그리스은행들에 대한 긴급융자를 통해 그리스정부 차입의 3분의 1 가량을 간접적으로 융통해 준 사실도 밝혀졌다. 유로화가 위기의 멍석을 깔아주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리스정부는 지출삭감과 증세로 재정적자를 2014년까지 3%로 줄이는 조건으로 유로존 국가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10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받게됐다. 그러나 경기침체기에 그리스가 강력한 재정긴축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겠느냐가 우선 문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다 해도 부채는 GDP의 150%까지 올라가며 이자지급액만도 GDP의 7.5%로 예측된다.
재정적자를 줄이려면 통화가치절하를 통한 경상수지조정이 필요하지만 유로존에 묶여 환율조정이 불가능하고, 그리스의 통화가치 절하는 곧 유로존 탈퇴를 의미한다.
유로존을 이탈해 통화를 평가절하한다해도 이렇다 할 제조업이나 수출산업도 없다. 긴축을 거듭할 경우 경제가 더욱 침체돼 국가적 소요사태를 촉발하고 재정적 출혈을 멈추지 못하면 결국 2001년의 아르헨티나처럼 국가부도사태를 불러올 우려가 다분하다.
그리스 위기의 바이러스는 비슷한 증후군을 보이고 있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탈리아와 벨기에 등 유로존 국가로 바로 전이된다.
국제결제은행이 파악한 그리스에 대한 EU은행들의 대출잔액은 1930억달러에 달한다. 그리스 국채가 폭락하고, 이를 소유한 그리스 은행들이 리먼브러더스 재판이 되면 그리스 은행에 돈줄을 기대 온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등도 신용경색에 빠진다.
그리스가 채무재조정에 들어가면 부채더미에 오른 다른 회원국들이 연쇄부도를 일으킬 위험성이 높아지고 유로화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폭되면서 유로존의 바벨탑이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파국을 막으려면 우선 그리스 국민들이 대대적 임금삭감 등 구조조정을 감수해야한다. ECB가 통화팽창정책으로 국채를 대량 매입해주고 결국 인플레를 일으켜 그리스 등 재정위기에 빠진 유로존의 실질부채를 줄여주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합의가 쉽지 않다.
독일국민들은 분수에 넘치는 재정지출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를 돕는 데 부정적이다. 독일정부가 그리스 지원정책에 시간을 끈 것도 비판적 국민여론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결국 메르켈총리 정부는 그리스에 대한 지원책 때문에 중간선거에서 패배하는 정치적 대가를 치렀다.
그리스 위기는 유로존의 해체를 바라는 유럽 내외부의 정치세력들이 의도적으로 부풀린다는 음모적 시각도 있다. 유로존 정상들과 EU재무장관들이 '시장투기세력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유로화 지키기'에 나서고, 다른 유로존 국가로 위기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7500억 유로 규모의 재정안정지원기금도 조성키로 했다.
'자금폭탄'으로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그리스 '비극'의 불씨는 아직도 도처에 널려 있다.
GDP에 대한 재정적자비율로 따진다면 미국이 그리스 못지않게 심각하다. 그럼에도 미국이 버티는 것은 연방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유로존의 바벨탑에는 재정을 조율하는 사령탑이 없다. 영어의 위기(crisis)는 병세의 중요한 전환점을 뜻하는 그리스어(krisis)에서 비롯됐다. 유로존이 명실상부한 유럽합중국이 될지 아니면 야심적인 실험에 그치고 말지, 그리스 재정위기는 그 운명을 가름하는 중대한 분수령이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