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출신의 경제학자 하벨모(Haavelmo)가 주창하고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Haavelmo-Theorem'의 내용은 이러하다.
정부가 지출을 증가시킬 때 그 증가분을 전부 세금으로 충당하면, 재정적자를 야기하지 않고도, 바로 그 증가된 정부지출만큼 국민소득이 증가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예를 들어, 소득세 10조를 더 거두어 이를 도로건설과 같은 일에 사용하기만 하면 GDP는 10조가 증가하는 것이다.
요술방망이가 아닌가?
노벨위원회가 인정한 이 요술(Haavelmo는 198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의 핵심은 민간의 가계와 달리 정부는 저축성향이 '0'이라는 것이다.
민간의 가계에서는 소득의 일정한 부분이 저축되고 나머지가 소비되는 것에 비하여 정부의 지출은 100%가 전부 소비되며 유효수요로 작용하여 이 차이가 승수효과를 통해 높은 국민소득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모델의 한계는 명백하다.
폐쇄경제모델이며 유효수요가 부족하지 않은 경제에서는 임금상승과 인플레이션만 유발할 뿐이다. 재정적자를 유발시키지 않으므로 국채발행을 통한 민간투자의 구축효과(Crowding-Out-Effect)가 없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경기안정화정책에서 Haavelmo-Theorem의 의미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균형재정의 조건에서 정부지출과 조세의 동시적 증가를 통하여 전체경제의 유효수요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을 풍미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Haavelmo와 그의 Theorem은 완전히 잊혀진 존재이다.
어느 국내학자는 하이에크(Hayek)를 이야기 하면서 하이에크는 (노벨상 중) 하나의 수상자가 아니라 위대한 수상자이며 (예컨대) 하벨모는 오늘날 거의 인용되지 않는 하루살이 수상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Haavelmo가 경제학에서 Hayek와 이론적으로 대척점에 서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학자 Hayek에게 그의 시대가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만년에 인정받기 전까지는 케인즈와 개입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냉대를 받으며 살았다고 봐야한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는 자유시장경제체제를 꺽달지게 옹호하였다.
경쟁시장을 세상의 사람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유용한 지식을 테스트하고 분별해주는 경제의 유일한 조정기구, 보다 나은 지식의 발견과정으로 파악하고 계획경제가 절대로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설파하였다. 그가 자신의 시대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Hayek은 사회적으로 정착된 제도는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의 계획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문화적 진화의 산물로서 정착된 사회규범, 예를 들어 사유재산권, 책임원칙, 계약 등 자유시장의 기초가 되는 수많은 행동규칙들은 이 진화과정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이들을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하였다('이성의 자만').
그러나 Hayek이 자신의 논지를 펴던 시기는 현재와 다른 사회적 분위기에 있었다. 정부의 민간경제에 대한 과도한 간섭과 공공부문이 전체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시기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어떠한가?
현재는 시장과 자유주의의 과잉의 시대이다. 정부의 필요한 규제도 부정되고 명백한 시장의 실패도 애써 외면하고자 한다. 시장이 작동 할 수 있는 조건이 자연적으로 성립되지 않은 분야에서도 인위적으로 시장을 조성하려고 한다. 오염배출권을 시장에서 거래시키려고 하고 교육문제도 시장논리로만 해결하려고 한다.
경제학도 거리의 옷차림처럼 유행을 따르는가? 주식시장처럼 파동을 타는가? 유행과 파동에는 항시 반등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반등은 적절한 수준에서 멈추지 못한다(Overshooting).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지만 이 시기가 자유주의가 지나쳐서 이제 곧 반등이 시작하려는 시점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될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정착된 제도는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Hayek의 가르침은 많은 공감을 주면서도 다시 새겨보면 과연 그 구분이 무엇인지 불확실하다.
그가 중요시 하는 사유재산제도 뿐만 아니라 터부시하는 사회보장제도도 시간이 흐르면 사회적으로 정착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지는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수년전에는 독일병의 진원으로 비판받았지만 이번의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그 경기안정적 역할에 대하여 학계에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사회보장이 미약한 미국에 비하여 독일의 근로자들의 소비수요는 경기하락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줄지 않으면서 경기침체기에서 버팀목 역할을 잘 해주었기 때문이다.
시장이 작동 할 수 있는 조건이 자연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분야에서도 시장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려는 '시장근본주의적 사고'도 Hayek 자신이 주장하는 진화적 · 자생적 질서에 해당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시장원리와 이윤동기가 작동하지 않는 부분이 생활의 여러 영역에 자리잡고 있음을 수용하지 못한 채 이런 곳에 조차도 강제적으로 시장원리를 도입하려는 자세는 시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즈음에 잊혀진 경제학자 Haavelmo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금융위기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금융규제가 필요하다는 것 뿐 만이 아니다. 현재의 중국, 독일, 한국 같은 수출주도형 국가들이 경상수지 흑자와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이루는 성장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이 아니라는 것. 이러한 global imbalance는 국내수요를 확충해서 극복해 나가야 한다.
튼튼한 국내수요는 구매력을 가진 서민과 중산층을 의미한다. 양극화로 무너진 서민과 중산층을 분배와 복지재정 강화로 살려나가야 한다. 분배의 필요성과 복지를 통한 경제성장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제시한 사람이 Haavelmo이다.
Haavelmo가 한국사회의 더 근본적인 문제인 분배와 복지정책 이전 시장의 1차적 분배에 대해서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약력] 독일 Hamburg 대학교 경제학 석/박사,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KPMG 독일 프랑크푸르트 Branch 근무, 계명대학교 경영대학 세무학과 교수, 중부지방국세청 납세지원국장, 홍익대학교 경영대학/세무대학원 교수(現),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자보호위원회 위원장 (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