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재앙을 일본 언론들은 '동북관동대진재'(東北關東大震災)로 부른다.
진도 9.8의 대지진과 최고 23m 높이의 쓰나미, 게다가 원자력발전소(원전:原電)의 방사능유출사태까지 겹친 일본열도 동북 해안지대의 대재앙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재앙의 엄청난 규모다. 3․11 대지진은 지구의 지각변동을 일으켜 지구의 자전축을 약 16.5cm 움직인 것으로 조사됐다. 진원에 가까웠던 미야기현 오지카반도는 동쪽으로 5.2m 이동하고 1.1m 침몰했다. 이 때문에 쓰나미가 끝나도 바닷물이 빠지지 않고 있다. 일본 본토는 동쪽으로 2.4m 에서 최대 4m 까지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반도도 덩달아 움직였다. 한국천문연구원은 독도는 동쪽으로 5.16cm, 울릉도는 4.07cm, 서울도 2.11cm 이동하는 등 한반도 전체가 0.89cm 에서 최고 5.16cm 움직였다고 밝혔다.
자연재앙의 규모가 갈수록 대형화되고 빈발하면서 이른바 '큰 한 방', 즉 '빅 원'(Big One)의 공포가 일상화되고 있다. 아무리 준비가 잘 된 '매뉴얼사회'도 자연의 대재앙 앞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 그대로 입증됐다. 자연에 대한 겸허한 자세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환경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폭발에 따른 '2차 재앙'은 원전의 장래에 대해 근원적인 고민을 우리 모두에게 안기고 있다. 사태가 심각해진 원인을 놓고 도쿄전력의 사실은폐와 축소보고의혹, 그리고 일본정부의 '서툰 대응'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게다가 국제 원자력관련 전문가들은 '원전설계 및 시공이 애당초부터 부실했다', '원전건설과 규제업무가 분리 안 돼 감시가 소홀했다'는 등등 원전 자체는 안전한데 건설 및 감시과정에서의 잘못 때문에 사고가 난 것처럼 한 발 비껴서고 있다.
문제는 지진 안전지대가 따로 없고, 내진(耐震)설계만으로 원전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본열도는 지각판 들의 경계에 있어 지진이 심하다고 하지만 유라시아판 위에 있는 중국 탕산에서 1976년 7.8규모 지진으로 25만 명이 사망했고, 2008년 쓰촨에서 규모 7.8 지진으로 10만 명이 희생됐다.
원전구조물이 지진에 버틴다 해도 외부충격으로 설비가 고장 나 중대사고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고도 원전 본체는 괜찮았지만 냉각수를 공급하는 전력계통이 끊어지면서 일어났다.
'원전 선진국' 일본에서 사고가 나면서 세계 원전 이용국 들의 '원전 드라이브'에 일제히 제동이 걸리고 있다. 새로운 원전 건설을 잠정 중단하고, 노후 원전은 속속 가동을 멈추고 있다. 옛 소련 체르노빌 참사 이후 세계원전산업은 20년간의 긴 '빙하기'에서 벗어나 근년 들어 '원전 르네상스'를 구가하던 중이었다.
원전을 포기하려해도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이 문제다. 세계 전체전력의 13.5%는 이미 원전이 생산 공급하고 있다. 프랑스는 80%, 일본은 근 40%, 한국은 31.5%를 원전에 의존한다. 이를 석유로 다투어 메우려든다면 국제석유수급은 패닉상태에 빠진다. 풍력 태양광 조력 등 다른 신재생에너지들은 아직은 경제성이 낮아 원자력을 대체할 수가 없다.
지진이 일상화된 나라에 55기의 원전으로 '원전선진국'을 건설한 그 자체가 하나의 역설(逆說)이다. 통계상 사고확률로 원전은 가장 안전하다고 하지만 한번 사고가 났다하면 치명적이다. 만용에 가까운 일본의 자신감은 그들 기술자와 그 기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고 그 믿음이 '약속되지 않은 땅'에서 갖가지 기적을 일구어 왔다.
일본은 2차 대전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제2의 경제대국을 이루어냈고, 자원 빈곤과 1985년 '플라자합의'에 따른 '살인적'인 엔 고(高)속에서도 경쟁력을 잃지 않고 '제조업왕국'으로 우뚝 섰다. 이번 쓰나미는 피해지역이 워낙 넓은 데다 원전파괴와 전력공급 불안, 도로와 철도 등 주요기반시설 손궤로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4~5%를 휩쓸어 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년의 긴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데다가 대지진으로 인한 정부지출확대는 이미 최악의 상황인 일본의 국가채무와 재정적자 문제를 더욱 악화시켜 일본경제를 '침몰'시키지 않을까 걱정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일본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특히 세계의 '부품 및 핵심소재 공장'으로서의 막중한 역할을 감안하면 일본의 침몰은 세계경제에도 재앙이다.
하지만 일본은 대재앙과 역경 속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여 왔고 이를 '기적'으로 바꾸어놓은 저력을 갖고 있다. 지진사태 이후의 대규모 지출이 일본경제의 만성화된 수요부족과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도 한편에선 고개를 든다.
대재앙의 참화 속에서도 일본인들은 '미련할 정도로' 차분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 '인간정신의 진보'라는 찬사까지 쏟아지고 있다. 아우성 치지 않고, 남을 배려하며, 정부를 미워하지 않고 고통을 조용히 감내해 '인내하는 민족'이라는 자기최면에 빠진 게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다.
수 없는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와 함께 살아 온 그들의 유전자속에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순응과 체념이 체질화 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버리는 신(神)이 있다면 살리는 신도 있다', '재앙을 복(福)으로 바꾼다' 는 그들 속담이 상징하듯 화(禍)를 복으로 바꾸는 특유의 적극적인 사고와 능력이 그들에게서 돋보인다. 자연의 대재앙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이를 참고 이겨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동시에 세계에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아키히토 일본국왕은 며칠 전 원전 방사능 유출을 막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감사를 표하며 모두를 위해 원전이 무사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국민담화방송을 했다. 일왕의 국민담화방송은 1945년 히로히토 천황의 일본항복 방송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80여명의 '이름 없는 영웅'들이 후쿠시마 원전의 '최후결사대'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일본열도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들은 집을 나섰고 부인들은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를 남편을 보내며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1995년 고베 대지진이 이어 2011년 대지진은 일본인들에게 또 하나의 심리적인 큰 전환점을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찾은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이 자기 같으면 일본주식을 팔지 않겠다고 언급한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차분하고 정보위주의 절제된 일본 공영 NHK방송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방송들에서는 '통곡', '궤멸', '아수라장', '초토화', 쑥대밭', '암흑천지', '도시가 통째로' 등등 극한적 표현과 흥분이 넘쳐났다. '차(車)·전자 반사이익..., 여행업은 날벼락' 등 일본 대지진에 따른 국내산업의 손익계산을 따지는 약삭빠른 보도도 신문에 나돌았다.
"NHK보도는 한국인 눈으로 보면 촌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뉴스보도는 재미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정확하고 차분하게 전달해 온 것이 방송의 신뢰를 높여왔다"는 NHK출신 어느 국내대학 초빙교수의 인터뷰가 일본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실감케 한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