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처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제 오후 국회를 방문, 여야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국회가 한·미 FTA를 비준해주면 발효 3개월 내에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재협상을 미국에 요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동안 민주당은 'ISD 재협상 없이 비준안 통과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한미 FTA에서 최소한 ISD 조항은 폐기돼야 한다"면서 "이 대통령의 새로운 제안이 있었으니 이를 당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오늘 의원총회를 열어 이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한·미 FTA에서 ISD 조항이 핵심 쟁점으로 부각된 이후 청와대와 정부는 "재협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재협의 자체가 국제적 관례에 어긋나고 국가 신인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논의 자체를 차단시켜왔다.
대통령의 제안은 그런 의미에서 '파격적'이다.
대통령의 입장 선회는 비준동의안의 합의처리를 요구하는 한나라당내 온건파의 움직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은 야당과의 협상이 무산될 경우 단독처리한다는 방침을 일찌감치 세워놓았었다.
비준동의안은 재적의원 295명 가운데 절반(148명)이 출석하고 출석 의원 과반수가 찬성하면 통과된다. 한나라당 의원 168명이 뭉치면 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당내 온건파와 쇄신파가 일방적 단독처리에 반대하고 나서 현실적으로 의결정족수를 채울 수 있을지가 의문시된다.
정태근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한·미 FTA 합의 처리를 촉구하며 14일부터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당 '국회 바로 세우기 모임' 소속 의원들은 정 의원 단식 농성장에서 긴급 회동을 하고 여야 협상파 의원 사이의 별도 대화창구 개설을 추진키로 했다.
이와는 별개로 '여당의 일방 처리와 야당의 물리적 저지 반대' 공동선언에 동참한 여야 8인중 홍정욱 의원 등 여당 의원들은 당내 의원들을 접촉하며 지지세 확산에 나섰다.
ISD 재협상요구를 조건으로 합의 처리에 동의하는 여야의원이 90명에 달한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여당의 단독 처리가 어려워지고, 여야가 극적인 합의를 보거나 야당을 설득할 만한 청와대의 새 제안이 없으면 비준안 국회 통과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비관론이 고개를 드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국회를 찾은 것이다.
대통령의 제안은 '지난달 여야 원내 대표 간에 가(假)합의된 사항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 민주당 측 입장이다. ISD는 그만큼 여야 의원들 간에 '뜨거운 감자'였던 셈이다.
외국인 투자자를 보호하고자 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ISD 조항은 필요하다.
이 경우 외국인 투자자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차별을 방지하도록 내국인 대우 원칙만 확실히 보장해주면 된다.
우리의 사법권을 벗어난 지역에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이는 사법주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내국인에 대한 역차별이 된다.
실제 미국 기업들은 ISD 제도를 많이 활용하고 경험도 많다.
공공부문은 원칙적으로 제소할 수는 없지만 '극히 심하거나 불균형적으로 미국 기업 이익을 침해할 경우'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단서조항도 담고 있다.
국민의 안전 건강 복지 환경 등을 위한 공공복지분야는 갈수록 광범해진다.
양국 간 투자·무역 과정에서 지금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는 수많은 구체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고, 과연 어떤 것이 '공공부문'에 해당하는지를 놓고 두고두고 분쟁도 예상된다.
더욱 고약한 것은 한·미 FTA에서 이 ISD 조항은 한국에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미국이 호주 및 이스라엘과 맺은 FTA에는 이 ISD가 빠졌고, 한·EU FTA에도 ISD 조항은 포함되지 않는다.
독일과 프랑스를 제외한 20개 EU 개별 국가와 맺은 투자보장협정(BIT)에는 ISD 조항이 포함됐다고는 하지만 이를 해외투자의 '표준약관' 같은 것으로 당연시하는 정부의 자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미 FTA비준을 둘러싼 찬반대립은 가히 국론(國論) 분열 수준으로 치달아왔다.
비준 반대 측 주장이 일부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사이버 공간에 확산되고, 이를 비준 찬성 측이 '괴담'(怪談)으로 몰아붙이면서 양측 공방은 지금도 접점 없는 평행선을 긋고 있다.
서로 간의 주장과 반박이 객관적 진실을 파헤치려는 이성적 자세보다는 정파적이고 감정적인 구호의 틀에 갇혀 국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혼란만 부추겨온 것이다.
모든 논란은 정부의 소통 부재에 근본 원인이 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국회조차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협정이 타결됐다.
'괴담'은 국민과 소통이 안 되고,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할 때 독버섯처럼 퍼진다.
논란이 계속되면서 새로운 사실과 의문점들이 드러나고, 석연찮은 해명과 논박이 꼬리를 물면서 합의점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양상이다. ISD 조항도 극히 최근에서야 문제로 불거졌다.
한·미 FTA는 총론 못지않게 각론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정부는 '경제영토의 확장'이고, '수출 확대는 물론 한국에 대한 투자증대로 일자리도 늘어나는 국가 생존전략의 하나'이고, '일본 노다 정부도 FTA 확대를 국가 제1목표로 삼는다'며 조속한 비준을 촉구해왔다.
한·미 FTA 효과로 미국 시장 선점(先占)을 내세우지만 한국의 주요 수출품에 대한 미국의 관세는 이미 충분히 낮아진 상태고, 그나마 미국 현지생산이 많아 관세의 존재는 제품경쟁력과 큰 관계가 없다.
한국경제는 일부 부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방된 상태여서 미국과의 FTA로 말미암은 단기적인 교역증대효과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제에 국경이 흐려지고, 기업의 글로벌화가 본격화하는 시대에 '경제영토 확장' 운운은 너무도 구시대적,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일본이 TPP(환태평양경제제휴협정)협상에 참여하는 사실 자체를 놓고서도 국내 반대가 비등한데도 일본이 한·미 FTA에 피해의식을 느껴 사실상의 미·일 FTA를 서두른다는 식의 우리 정부 홍보는 너무도 아전인수(我田引水)다.
대통령 스스로 ISD의 문제점을 인정함에 따라 비준동의안 합의처리는 탄력을 받게 됐다. 대통령은 "미국이 뭐라고 하면 책임지고 설득하겠다"고 밝혔다지만 재협상 요구에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도 중요한 변수다.
미국은 협정 타결에서 의회 비준까지 4년 3개월이 걸렸다.
국내 비준을 둘러싸고 한국에서의 치열한 논란과 진통은 한·미 FTA의 건전한 앞날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다.
내년 1월 1일 발효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 정부가 열린 자세로 미국을 설득하고, 여야가 절충점을 찾아 비준동의안을 합의처리하는 쪽이 진정으로 한·미 FTA의 앞날과 국익을 위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