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을 추월하며 스마트폰 제일의 강자로 등극한 삼성전자가 세계 최대 IT시장인 미국에서 카피캣(copycat: 모방자)이란 오명(汚名)을 쓰게 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의 배심원단은 삼성전자가 애플의 소프트웨어 및 디자인 관련 특허 5건을 고의적으로 침해했다며 10억 달러규모의 손해배상을 결정했다. 애플이 삼성의 통신관련 기술특허를 침해했다는 삼성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이 평결은 최종판결이 아니다. 한 달 내 공식판결이 나고, 평결이 뒤집어지지 않을 경우 삼성은 연방순회(Circuit) 항소법원에 항소할 예정이다.
항소법원으로 올라가면 심리에 7개월가량 걸리고 최종판결에는 1년에서 1년 반이 소요될 전망이다. 항소심에 불복하면 대법원까지 가야하는 등 갈 길은 아직도 멀다.
하지만 항소법원은 특허권침해 등 본질사항과 관련해 판결을 뒤집은 경우가 극히 드물고, 대법원은 이 같은 특허권소송을 다뤄본 적이 없는 등 상황은 삼성에 호락호락 하지 않다.
더구나 애플은 특허권을 침해한 삼성의 관련제품 8개 품목의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27일 법원에 냈고, 법원은 내달 20일 심리에 들어간다.
이번 소송의 핵심은 삼성전자가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디자인특허를 침해했는지 여부였다. 한국 법원은 애플이 주장한 디자인 특허 6건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아이패드 디자인 관련 1건을 제외하고 5건을 모두 인정받았다.
직사각형에 둥근 모서리, 화면 속 아이콘을 가로 네 줄, 세로 다섯줄로 배치한 스마트폰 외부 디자인과 내부 이용자인터페이스(UI) 등이 지적재산권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삼성전자 뿐 아니라 다른 스마트폰 제조사들도 앞으로 이 디자인과는 뭔가 다르게 제품을 만들어야하는 부담을 안는 등 그 파장은 일파만파다.
애플은 이번 소송이 "특허나 돈을 뛰어넘어 가치(Values)에 관한 소송"으로 규정지으며 배심원단이 "삼성의 행위가 의도적이며, 도용(盜用)은 옳지 않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다"며 득의에 차 있다.
반면 삼성은 소비자의 선택권과 기술혁신을 제약하고 제품가격을 올리는 등 미국소비자에게 손실을 안기는 결정이라며 삼성과 여타 회사들의 잇단 혁신들로 향상되고 있는 디자인과 기술을 특정회사가 독점토록 특허법이 악용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배심원단은 일반인의 시각에서 삼성전자가 애플 디자인을 모방했다고 느꼈고 외관상 '거의 같아 보이면(substantially the same)' 특허침해로 봐야한다는 애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5년에 걸친 개발품을 삼성은 3개월 만에 베꼈다'는 애플의 호소가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좋은 녀석(good guy)'과 '나쁜 녀석(bad guy)'을 가려내는 배심원들의 속성도 한 몫 했다.
제품의 외관이나 느낌으로 브랜드나 제조회사를 떠올릴 정도로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애플 고유 디자인으로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 지적재산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갤럭시폰 개발 초기 삼성의 내부문건과 삼성이 구글에 보낸 e메일이 결정적 악재로 작용했다. 애플이 소니 디자인을 모방했다는 애플 전 디자이너 증언이 증거로 채택되지 못한 것도 삼성으로서는 불운이었다.
애플 디자인을 모방하지 않고서도 마이크로소프트와 노키아가 윈도폰과 스마트폰을 내놓았다는 사실 또한 '경쟁업체간 모방이 업계관행'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이번 평결은 삼성과 애플이 4대륙 10개국에서 벌이고 있는 50여건의 소송들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삼성과 애플간 분쟁이 삼성 스마트폰에 운영체계(OS)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구글과 애플간 대결이라는 점에서 이번 평결은 더 큰 분쟁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삼성 다음의 최대 패자(敗者)로 구글이 부각되고 있고, 삼성과 안드로이드 핸드세트 메이커들은 애플에 특허료를 내던지 애플디자인과 다른 독자적 혁신으로 애플 특허를 비켜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번 평결이 미국시장에서 삼성의 기업이미지와 삼성제품에 대한 소비자인식에 주는 악영향은 돈으로 따질 수가 없다. 10억달러 배상금은 삼성전자의 스마트기기를 구입한 모든 사람들이 삼성제품이 없었더라면 애플 제품을 샀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정 하에 계산된 것이다.
앞으로 소송과정에서 감액 조정될 여지가 없지 않고, 이번 소송에서 디자인 침해가 인정되지 않은 갤럭시탭10.1은 판매금지가 해제될 전망이다.
문제는 삼성제품의 이미지 손상이고, 그에 따라 삼성의 브랜드가치가 하락할 경우 배상금이나 소송비용보다 더 큰 타격이 우려된다. 소송패배여파로 27일 하루에만 삼성전자주가는 7.4%가 폭락해 시가총액 14조원이 증발했다.
소송 패배에 따른 '피해관리'(damage control)가 발등의 불이다. 남은 소송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디자인과 소프트웨어 역량을 키워 모방시비에서 벗어나야 한다. 실제 동일 사안에 대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한국 법원은 판결을 달리 해 절망적인 것인 아니다.
삼성은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기술혁신의 세계적 리더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아니고 이들을 재빨리 따라잡아 때로는 이들을 능가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로서 글로벌 입지를 다져왔다.
매출 면에서 세계최대의 기술기업으로 올라섰지만 창의성과 이윤폭에서는 세계적 리더가 되지못해 지닌 실력만큼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세계시장의 최강자로 올라 선 스마트폰기술에서 애플의 카피캣이란 오명을 쓰게 된 것은 대단한 불행이다.
애플의 제소에 통신관련 실용특허 침해로 맞불을 놓은 삼성의 전략이 패배를 자초한 측면도 없지는 않다. 애플의 디자인과 기술이 애플 것이 아닌 '선행기술'(prior art)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객관적 증거와 사실로 이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했다.
반면 애플은 프랜드(FRAND)조항으로 삼성 통신특허침해 시비를 비켜갔다. 어떤 기업의 특허가 기술표준이 되면 특허권자는 다른 기업에 로열티를 내고 사용토록 해줘야한다는 의무조항이다.
미국 배심원평결은 전문적인 사안을 문외한들이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하는 특이한 제도다. '자국기업 편들기' '애국적 평결' '보호주의'로 폄훼함은 또 다른 '애국주의'의 발로일 뿐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삼성의 모바일기기들은 구글의 안드로이드 OS에서 구동되고 있다. 삼성이 궁극적으로 구글과 경쟁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징조들이 누적되고 있는데도 모바일 소프트웨어 능력을 개선시킬 수 있는 자체 운영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제품 디자인을 개편해 모방시비를 잠재우고, 자체 OS시스템을 개발 확보하고, 시장에서 부단한 혁신으로 당당하게 승부하는 것만이 삼성의 살 길이자 진정으로 퍼스트 무버가 되는 길이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