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민심이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다. 70%중반까지 치솟던 박근혜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추석직후 6%9%포인트까지 떨어졌다. 추석직전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된 3자회담과 야당에 대한 대통령의 직접적 비판 등이 이어지면서 소통과 통합보다는 갈등과 대립 이미지가 국민들 뇌리에 깊게 각인된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추석 때는 가족과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이런 저런 일들이 여과 없이 도마에 오르기 마련이다. 추석 후 민심의 흐름이 무서운 이유다. 추석민심이 앞으로의 정국흐름을 좌우하고, 이번의 경우 내년 지방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해서 정치권이 긴장 해오던 터다.
이번 추석 밥상머리에 올려진 '안주꺼리'(대화소재)는 푸짐했다. 국정원 댓글 의혹사건, 통합진보당 이석기의원의 내란음모사건, 그와 관련된 민주당의 장외투쟁과 국회파행, 게다가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婚外)아들 논란과 청와대의 사퇴외압설 등등.
그러나 이 모두를 한데 뭉친 압권은 박근혜 대통령과 김한길 민주당대표가 서로를 공박하며 밥상에 올려놓은 '국민저항'이었다. 박대통령은 야당이 "장외투쟁을 고집하며 민생을 외면하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고, 김한길 대표는 "박대통령의 불통(不通)이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서로가 옳다고 우기며 국민들에게 상대를 혼내달라고 주문한 어이없는 광경이 연출된 것이다. 정치의 실종이자 불통의 극치다.
이른바 '국민적 저항'의 중심에는 '민생'이 자리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여야 대표와의 3자회담에서 "야당이나 여당이나 정치목적은 민생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하루 빨리 힘을 모아 국민 삶이 나아지도록 노력 할 때"라고 강조했고, 다음날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야당이 장외투쟁을 고집하면서 민생을 외면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고 그 책임 또한 야당이 져야할 것"이라고 경고를 발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한길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7달이 지났는데, 민생이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며 "박 대통령은 아직 민생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지금 민생이 힘겨운 것은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민생에는 무능한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야당 탓으로 책임을 떠넘기기엔 오늘의 민생이 너무 고단하고 힘겹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은 누구 말을 믿고 누구를 혼내고 '저항'에 나서야 하나?
추석안방의 화제가 정치이슈로 채워질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청와대와 여권 및 야당이 여론전을 펼쳤지만 정작 국민들은 정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
매경이코노미가 추석직전 여론조사업체 마크로밀엠브레인과 실시한 추석민심 동향에 따르면 '현 정부에서 민생이 안정적이다'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56.6%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91.2%가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고 답했고, 중산층 복원이 이뤄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67.4%가 부정적이었다.
갤럽 조사에서도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로 '경기 회복, 경제 활성화'(14%) '일자리 창출, 실업 문제'(11%) '물가 안정'(8%) '부동산 가격 안정'(8%) '서민을 위한 정책 추진'(7%) 등이 꼽혔다. 정부의 최우선 해결 과제 상위 5개가 모두 경제 문제였다.
이는 추석연휴동안 지역구에서 민심을 탐방한 여야 의원들의 진단에서 그대로 확인됐다.
"경제 얘기가 압도적 이었다" "정쟁을 접고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해결에 즉각 나서라는 주문과 질책이 현장에서 쏟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3자회담에서 드러난 우리 정치권의 현주소는 참담하다. 합의문도 없고, 회담결과도 각자 하고 싶은 말들만 골라 따로 발표했다. 추석 후 민심동향도 여야가 자기들에게 편리한대로 각기 해석하는 판이다.
상생은커녕 상대를 무릎 꿇게 만들어야 할 적(敵) 쯤으로 여기며 '그들만의 싸움'에 골몰하다 정치권 전체가 민생을 외면한 꼴이 된 것이다. 유연성 없는 대통령의 리더십, 들러리로 전락한 여당의 무능, 야당의 발목잡기 식 정치공세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다. 야당이 야속하더라도 자주 만나야 한다. 취임 6개월 만에 야당 대표와 회동했다는 것부터 비정상이다. 3자회담에서 조정역할은커녕 회담결렬 후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 민주당의 주장을 부인하고 비판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좋게 비칠 리 없다.
박 대통령의 강경모드는 높은 지지율을 업고 야당과의 타협 없이도 국정 운영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고무됐던 것으로 들리지만 지지율에 목맨 정치는 모래성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추석민심은 일깨워주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대통령의 국정지지도는 60%대를 고수하고 있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외회내빈(外華內貧)이다. 대북 정책과 외교안보 분야에선 평가가 높지만 경제 성장과 경제민주화, 교육 정책 수행에 대해서는 못한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특히 박근혜정부의 핵심 과제인 '창조경제'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답변이 압도적이었다. 경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인기가 높은 대북 정책의 핵심 목표에 대해서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중산층이 붕괴하고 민생이 이토록 어려운데도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한다면 이는 정상이 아니다. 대북정책과 외교안보 분야에서 높아졌다고는 하나 이는 경제회복이 뒷받침되어야 지속될 수 있다.
추석 이후 곧바로 정기국회의 민생법안 처리와 새해 예산안 심의 등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강대 강'으로 치달을 경우 국정 운영이 발목 잡히고,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만 불러온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모든 법안처리 과정에서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원칙의 정치는 물론 좋은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공감하는 원칙이 아닌, 나만의 원칙은 독선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파행정국의 최대 피해자는 국민이고 민생이다.
야권주장이 억지이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해도 이를 조정해 내는 게 정치다.
청와대와 여당이 좀 더 포용력을 보인다고 해서 야당에게 굴복했다고 여기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민생 챙기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당연히 여권의 몫이기 때문이다. '매파' 위주로 구성된 청와대 참모진이 가뜩이나 원칙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의 시야자체를 좁히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다.
강경 드라이브가 여권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낼 수는 있지만 박대통령의 완고한 이미지를 고착화시키고 야권 지지층에겐 더 큰 감정적인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도 크다.
창조경제도 좋지만 당장 막힌 정국을 풀어내는 '창조정치'가 절실한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