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외교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두 나라 정상이 나란히 옆에 앉아도 악수는 고사하고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앞문은 걸어 잠궈도 뒷문은 슬며시 열어 놓는 것이 국가 간 외교다. 한일외교의 이런 '불통'(不通)에 적잖은 국민들이 답답해하고, 국제사회의 시선 또한 곱지가 않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이따금씩 박근혜대통령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박대통령은 애써 반대쪽을 바라보는 지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 정상회의 광경을 보고 '두 못 난 지도자'라는 핀잔도 이어졌다.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갖자는 일본 측의 거듭된 의사타진에 박대통령은 현 상황에서 정상회담을 한다면 "양국 관계 악화라는 역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계속 거부하고 있다.
"종군 위안부 문제와 역사인식에서 일본 지도자들의 퇴행적 발언들로 한국 국민이 계속 상처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상 간 회담에서 좋은 소식이 나오지 않으면 더 실망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 는 이유다. 방한한 미국 국무국방장관과의 면담 때도, 한국EU(유럽연합)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박대통령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반일감정은 물론 민감한 사안이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 폭주'가 계속되는 한 국민정서를 감안해서라도 일본에 선뜻 손을 내밀기는 쉽지 않다. '모든 것을 국민 눈높이에 맞추고', '국민만 보고 가는' 박대통령의 '국민 섬김'정치는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외교는 국민감정의 차원을 넘어서고, 지도자는 그 너머에 있는 전략적 이해관계를 차분히 헤아려야한다. 때로는 국민의 매를 맞아가며 국민을 설득하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것이 리더십이다. 국민 눈치만 보고 여론에 편승하는 것은 '여론 따라 하기''(followship)밖에 안 된다.
박근혜 정부는 반일 국민감정과 전략적 이해관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있다. 현실적으로 두 나라 간 영토 및 역사인식 문제는 단기간에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설사 두 정상이 만난다 해도 단칼에 해결되기는 어려운 문제다.
외교는 게임이다. 양국 간 많은 현안 가운데 당장 해결할 문제가 있고, 긴 안목으로 '관리'할 문제가 따로 있다. 긴 안목으로 '관리'해야 할 영토와 역사 인식문제가 나머지 현안들을 다 덮어버리고, 양국의 합리적 협력관계까지 손상시키게 만들 수는 없다.
일본의 한 우익 성향 잡지는 아베총리가 "중국은 싫어하는 나라지만 아직 이성적 외교는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은 교섭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나라"라고 말했다고 아베측근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비록 일본 관방장관이 "그런 말을 할 리 없다"고 부인하긴 했지만 과거사문제에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한국정부를 겨냥해 "한국에 진저리가 났다"(sick and tired) "단일 이슈에만 목을 맨 운동권 같은 나라"라고 일본 관리들이 대외적으로 비난을 서슴지 않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한일관계 악화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도 우리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객관적 3자인 헤르만 반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한일 양국이 "공유하는 민주주의나 전략적 이익을 기반으로 해결을 모색할 것"을 주문했고, 독도갈등은 국제법에 근거해 해결해야 하며 EU는 어느 편도 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미국 당국자들의 시각은 '한국의 억지가 심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한다. '긴밀한 관계에 있는 나라에 대한 침략을 자국의 침략으로 간주하고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집단적 자위권은 유엔(UN)헌장 제51조에 의해 유엔 가맹국 모두에게 부여된 법적인 권리다. 주일미군은 자위대로부터 병참 등 지원을 받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 방위를 위해서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은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이 '군사재무장' 운운하며 드러내놓고 일본의 이런 국제법적 권리를 막으려들 경우 국제적인 공감대를 얻기는 어렵다. 공해상에서 자위대가 미군을 지원하는 정도의 역할도 거부한다면 우리로서는 중요한 전력 자원을 스스로 잃는 꼴이 된다.
한일 관계는 크게 보아 대전환기다. 서로를 잘 아는 세대는 막후로 사라지고 신세대가 다수다. 국교정상화를 이끌었던 '한일 밀약시대'는 더 이상 되돌릴 수가 없다. 한국은 불평등한 우호관계를 더 이상 감내하지 않으려하고, 일본 역시 한일 관계의 특수성을 더 이상 배려하려 않으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양국관계가 특수관계에서 보통관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과 분쟁은 불거질 수밖에 없고 양국정부와 국민들은 이를 '정상상태'로 받아들이는 현실 인식이 중요하다.
과거청산과 관련해 일본은 1965년 당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유무상 청구권자금 5억 달러로 배상이 끝났으며, 전쟁 중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이 자주 참회하고 사과를 했다며 국제사회를 향해 여론전을 펴고 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겠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도 좀 더 성숙해지고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의 관계악화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상륙과 '일왕사죄 발언'이 기폭제가 됐다.
아베 신조가 당내 표결에서 역전승해 자민당 총재가 된 시점이 독도 방문 한 달 보름 뒤였다. 우리 땅이고, 우리가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에 '상륙퍼포먼스'로 평지풍파를 일으켜 아베의 '우경화 폭주'에 일조를 했다는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상륙퍼포먼스는 한국외교의 일대 '오점'이었다.
일본과의 역사인식과 영토분쟁은 우리만이 아니다. 중국 등과 함께 중장기적으로는 이를 다룰 수 있는 동아시아 다자외교 틀의 구축논의를 우리가 주도해나가고, 다양한 차원의 양자 외교 틀을 더 활발하게 작동시켜 갈등을 해소시켜나가야 한다.
미국이 일본에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군사안보상의 역할 확대를 인정해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있는 국제정세의 큰 흐름을 고려하면 한일 관계의 조속한 복원은 전략적으로도 긴요하다. 중국이 강조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 즉 견해가 다른 것은 제쳐두고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외교전략은 오늘의 한일 외교갈등을 푸는 데도 긴요하다.
민주주의와 동아시아 안보, 무역 및 경제협력 문화교류 등에서 한일양국이 공유하고 함께 추구해야 할 전략적 이익은 너무도 많다. 과거사와 영토문제 등 양국 간 갈등을 '낮은 수준의 분쟁상태'로 관리하면서 협력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큰 안목과 외교지혜가 절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