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방공식별구역(CADIZ) 선포로 동북아에 거센 안보격랑이 일면서 박근혜대통령의 외교력이 호된 시험대에 올랐다.
일본과 미국을 겨냥한 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선포에 제주도 남단 우리의 이어도가 포함되면서 미·중·일 간 '고래싸움'에 한국 '등'이 터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6개월 동안 외교 안보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첫 방문지로 미국을 선택해 한미동맹관계를 다졌고, 이어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의 돈독한 우호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그러나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추진에 미국이 지지를 표명하고, 공을 들였던 중국마저 일방적 방공식별구역 선포에 대한 우리 정부의 조정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해 한중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무색케 만들고 있다.
동북아 외교․안보 격랑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 미·중 양국의 패권 다툼이 본격화하면서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외교가 '원칙의 틀'에 스스로를 가둔 채 의전(儀典)위주의 정상외교와 '전략적 동반자관계 격상'이란 외교적 수사(修辭)에 우쭐해오다 미중일 3국 갈등 국면에서 졸지에 한국이 샌드위치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하면서 미국에 한 차례 뒤통수를 맞고, 이번에 중국에 뒤통수를 재차 맞은 셈"이라는 한 정부 당국자의 푸념이 이를 웅변한다.
중국 눈치를 보며 지연작전을 펴오다 뒤늦게 가입협상에 관심을 표명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도 미국과의 엇박자가 낳은 정책판단 미스로 우리를 당혹케 만들고 있다. TPP 출범을 주도해 온 미국은 한국이 참여 쪽으로 기운 데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선(先)TPP 출범, 후(後)한국 참여'에 무게를 둔 듯한 입장을 내놓고 있다.
TPP에 가입하려면 '관심 표명→참여국들과의 양자협의→공식 참여 선언→참여국들의 승인→공식 참여협상'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한국의 참여를 위해 TPP 출범을 늦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시사다.
TPP 출범 멤버로 들어가지 못할 경우 '게임의 룰' 을 정하는 데 동참하지 못하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룰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2011년 11월 참가선언을 하고 올 4월 참여국의 승인을 받기까지 1년 5개월이 소요됐다.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최대 경쟁상대인 일본의 협상 참여가 그만큼 우리 정부를 다급하게 만들었지만 '늑장참여'로 어렵게 일군 세계시장이 일본에 잠식당할 우려도 배제할 수가 없다.
미국의 시무룩한 자세는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의 '중국 중시' 정책에 대한 미국 측의 불편한 심기 때문이란 분석도 없지는 않다.
더구나 TPP는 환태평양 국가들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사실상 중국을 포위한 형국의 경제협정이어서 TPP 참여는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취하는 데는 우리에게 큰 부담이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힘을 과시하는 '중국꿈(中國夢)의 시동이며 이 꿈이 미국의 '아시아 중시정책(Pivot to Asia)'과 정면충돌하면서 동북아 안보격랑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6월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5세대 지도자로서 취임 후 처음 미국을 방문해 '신형대국관계'를 주장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핵심이익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대국 모델을 만들자는 얘기였다.
중국은 1980년대 '칼날의 빛을 칼집 속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남몰래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 단계를 지나 2000년대 '평화롭게 우뚝 선다'는 '화평굴기'(和平堀起)로 접어들었다.
'굴기'라는 말이 저항과 견제를 불러오자 '여러 나라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어울린다'는 '화해세계'(和諧世界)로 말을 바꾸었고, '역할을 해야 할 곳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에서 최근에는 '해야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는 '주동작위'(主動作爲)로 목소리를 계속 높여오고 있다.
이번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선포는 섬을 사슬로 이어 해양방위경계선을 만들어 전 세계를 작전권 안으로 흡수하려는 중국의 대양해군전략, 이른바 '도련'(島鏈)전략의 일환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 해양과 공중에서 자국 권리를 보호할 공중통제감시기술과 체제를 갖추었다는 대외적 선언인 셈이다.
미일 국방 당국은 중국의 ADIZ로 사전 통보 없이 군용기를 출격시키는 등 '무시전략'으로 일관하고 있고, 다만 민간항공기의 안전을 위해 미국정부는 자국 민간 항공사들에게 비행계획을 사전에 중국 정부에 알릴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미·중·일 간 군용기의 팽팽한 공중대치 상황은 우발적 충돌 위험성을 항시 안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대응이다.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KADIZ를 확대할 경우 일본의 동해지역 방공식별구역(JADIZ) 확대나 중국의 서해 CADIZ 확대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맞대응 차원에서 동중국해에 이어 서해에도 CADIZ를 선포할 경우 대북 방어태세가 흔들려 한반도가 직격탄을 맞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미·일과의 공조를 통해 한국이 중국에 맞서는 방안은 더욱 위험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중국이 미․일에는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한국에는 '대화로 풀자'는 유화 제스처를 보이고 있는 점은 한 가닥 위안이다. 하지만 그들 방공식별구역에 이어도를 포함시킨 것은 자국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이어도를 포함시키기 위한 포석일 수 있어 한중 간 EEZ 경계획정 회담에서 중국이 기존보다 더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인다.
이번 주 조 바이든 미국부통령의 한 중 일 3국 순방은 우리 입장에서 위기이자 기회다. 한국은 '약자'이지만 그렇다고 무시당할 존재는 아니다. 미국에게 한국은 품어야 할 동맹이고, 일본도 한미일 공조 차원에서 우호적인 한국을 필요로 한다. 중국도 한국을 미․일 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는데 전략적 이해관계가 있다.
한국이 이런 위치를 지렛대(레버리지)로 잘 활용해야한다. 한국이 가진 미국과 일본에 대한 영향력으로 한중관계를 조절하고, 또 중국과의 유대강화를 바탕으로 미·일에 대해 할 말을 하면서 우리 국익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야한다.
북한핵 문제를 끌어안은 채 미·중·일이 복잡하게 얽힌 중층적 다자외교를 푸는 대과업이다. 외치(外治)에 강하다고 자부하는 박근혜 외교가 그 진짜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