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는 없다"
늘어나는 복지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선 증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박근혜 정부'는 지금까지 쭉 이렇게 답변해왔다.
'박근혜 정부'는 증세 대신 지하경제 양성화와 각종 비과세·감면을 축소한 뒤 그래도 세수가 부족하면 국민 동의를 얻어 증세를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날, 증세는 없다던 정부의 약속은 무참히 깨졌다. 국민들의 의견은 수렴할 새도 없이 여야 의원들은 '패키지 딜'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며 단 며칠 만에 사실상 부자증세를 처리해버렸다.
야당에서 주장하는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을 3억원 초과(세율 38%)에서 1억5000만원으로 낮추는 소득세법 개정안 처리에 여당이 동의하는 대신 여당은 야당에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 법안 처리를 요구했다.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증세 법안이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식의 '딜'(?)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 8일 만에 증세 법안이 '뚝딱'(?) = 납세자 9만1000명이 적게는 150만원에서 많게는 450만원의 세금을 더 내게 만든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 하향조정 법안.
이 법안이 통과되는데 걸린 시간은 단 8일이었다. 9만1000명의 호주머니가 털리는데 고작 일주일 남짓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예년보다 늦게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는 180여건이나 되는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 조정 등 쟁점법안들은 우선순위에서 밀어뒀다.
지난달 9일부터 본격적으로 열린 조세소위는 180여건의 법안들을 검토한 후, 24일에서야 쟁점법안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성탄절이었던 25일과 일요일이었던 29일도 조세소위가 열렸지만 여야 의원들이 모였다가 파한 시간은 한 두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이후 30일날 여야가 '패키지 딜'을 통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 법안과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을 1억5000만원으로 낮추는 안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부자증세'는 실현됐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나 시민단체, 학계의 의견수렴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으며 조세소위가 철저하게 비공개로 이뤄진 탓에 왜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 하향조정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이유도 국민들이 알 수 없었다.
단 며칠 만에 9만1000명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증세안을 밀실에서 처리해버린 셈이다.
□ 비과세·감면 축소는 남의 일(?) =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 하향조정으로 최고세율을 적용받을 납세자는 4만1000명에서 13만2000명으로 대폭 늘어나고 이들의 세 부담도 1인당 최대 450만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표가 2억원인 사람은 약 150만원의 세금을 더 내야하며 과표가 2억5000만원인 사람은 300만원의 세금을, 과표가 3억원이면 450만원의 세금을 더 내야하는 셈이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의사나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과 대기업 상무 등의 임원급 정도이다.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 하향조정으로 정부는 연간 4700억원의 세수를 추가로 거둬들일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4700억원을 더 거둬들이려고 국민과의 약속을 져버렸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문제는 4700억원의 세수를 더 걷더라도 이 돈이 고스란히 국고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비과세·감면 항목을 축소 혹은 정리하려던 정부의 세법개정안이 칼질을 당하면서 모두 후퇴했기 때문이다.
정부안보다 후퇴한 농·수산물 의제매입세액공제 축소안과 재활용·폐자원 의제매입세액공제 축소안 등 각종 법안의 수정 통과로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 조정으로 인한 세수확보 효과가 줄었다.
정부는 수정된 세법개정안으로 인해 올해 3700억원의 세수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비과세·감면 정비 후퇴로 소득세로 얻을 수 있는 세수 중 상당액이 줄어든 것이다.
홍기용 인천대 세무회계학과 교수는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을 조정하면서 고소득자의 소득세가 늘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특별소득공제가 세액공제로 전환되면서 생기는 세 부담도 크다"며 "여론수렴 절차도 없이 국회 기재위 조세소위에서 며칠 얘기하다가 최고 과표구간을 1억5000만원으로 낮추면 국민들이 이를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하겠느냐"라고 지적했다.
이어 "과표가 1억5000만원 이상인 사람들 중 근로소득자의 경우에는 대기업 임원일텐데 이들이 늘어난 세금만큼 연봉을 더 인상하려고 할 것"이라며 "그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 등으로 가게 되면서 국가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