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짝퉁 명품시계, 수산물, 원두커피, 차량용 썬팅필름 등 그녀의 레이더망에 걸리면 무엇하나 무사하게 빠져나갈 수 없다.
여성의 섬세함과 꼼꼼함, 투철한 프로정신으로 무엇 하나 그냥 흘려보지 않고 살펴보는 덕에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과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가 더욱 안전해졌다.
우리 아이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꼼꼼히 볼 수밖에 없다는 전상란 수원세관 관세행정관(사진)은 58세라는 나이와 작은 체구가 무색할 정도로 의욕적인 관세공무원으로 정평이 나 있다.
원산지 표시 단속 업무를 하고 있는 전 행정관은 후배들이 장을 보러 간다고 하면 마트나 시장에서도 원산지 표시를 위반한 물건이 없는지 하나씩 꼭 건져오라고 할 정도로 직업정신이 투철하다.
프로정신이 투철하고 매사에 꼼꼼하다보니 성격 자체가 예민해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피곤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지만 전 행정관은 '중년의 8공주', '왕이모'로 통하는 등 화통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업무로 받는 스트레스는 직원들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거나 주말에 함께 놀러가 풀기도 하는데, 그 곳에서는 모든 직원들이 전 행정관을 '이모'라고 부르는 등 때로는 살가운 엄마 같이, 때로는 친한 동네 언니 같은 따뜻함을 보여주고 있다.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지난달 29일 냉동새우 등 639억원 상당의 수산물 원산지 표시 위반 사실을 적발해 '5월의 관세인'으로 선정된 전 행정관을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엄마의 마음'으로 단속하면 힘들 것 없어" = 아이들을 둔 엄마라면 먹을거리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음식에 각종 화학제품들을 넣는 것도 모자라 원산지를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면서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전 행정관도 같은 마음이었다. 지난 2월 일본산 꼬막의 원산지가 둔갑되는 방송이 나간 후 국민들의 불안감이 증대되자 관세청은 수산물품질관리원, 해양경찰청, 지자체와 함께 수산물 원산지 표시 특별단속에 들어갔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전 행정관은 이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관할지역 뿐만 아니라 타 지역까지 검사 범위를 넓혀 정보분석과 현장검사를 통해 5개 업체 7506톤(639억원)이 냉동새우와 건해삼 등 수산물의 원산지 표시를 위반한 사실을 적발했다.
적발하는 과정에서 업체들이 자료 제출에 비협조적이고 적발 사실도 인정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세관에 40년 동안 근무한 베테랑답게, 아줌마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업체들을 잘 설득해 원산지 표시 위반 사실을 시정토록 하기도 했다.
전 행정관은 "수산물은 대개 냉동창고인데 처음에는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너무 추워서 5분 만에 나왔다. 코트를 입고 들어가서 박스를 뜯어 일일이 검사를 했는데 이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업체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였다"며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먹는 것이라 생각하니 포기할 수 없었다. 인내와 끈기로 업체들을 설득해 좋은 성과를 이뤘다"고 말했다.
□ "확률 80%, 돗자리 깔고 점 보세요" = 전 행정관의 레이더망에 걸리면 그것이 무엇이 됐든 빠져나가기 어렵다. 공항은 물론 인터넷에서도 슈퍼나 마트에서도 그녀의 눈을 피해가기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힘들다.
오랫동안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에서 근무한 덕에 여행자의 얼굴이나 표정, 옷만 봐도 저 여행자가 수상한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전 행정관.
그녀가 지목하는 여행자의 80%는 밀수를 하다 적발되는 탓에 동료직원들은 전 행정관에게 "돗자리를 깔고 점을 보라"는 얘기까지 할 정도이다.
지난 2008년 인천공항에서 근무할 때 남아공에서 입국한 여행자가 물건을 잔뜩 가지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전 행정관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여행자는 "잎담배"라고 대답했고 아무래도 수상했던 전 행정관은 짐을 풀어보라고 요구했다.
잎담배를 압축한 것을 잘라보니 거기에서 대마초 14.5kg이 나와 당시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같은 해 일본인의 가방에서 코카인 3.6kg을 적발한 일도 있었다. 당시 식사시간 때라 다른 직원들은 다 식사를 하러 가고 전 행정관 혼자 앉아있었는데 한 여행자가 항공기가 도착한 시간도 아닌데 홀로 걸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여행자의 가방을 검사하자 엑스레이 영상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흔히 가방에는 짐이 흔들리거나 가방 외형이 찌그러지지 말라고 딱딱한 깔창 같은 물건을 덧대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덧대놓은 물건이 가방의 사이즈와 약간 차이가 있어 그걸을 들춰보니 여행용 바퀴가방의 손잡이를 넣었다 뺐다 하는 공간에서 코카인이 발견됐다.
이런 노하우에 대해 전 행정관은 "평소에도 물건을 볼 땐 주의깊게 보는 편"이라며 "의심될만한 물건을 가져오는 여행자는 말끝을 흐리거나 계절에 맞지 않게 옷을 두껍게 입기 때문에 물건 뿐 아니라 여행자도 이런 점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 '직업병' 걸린 이모지만…"따뜻한 선배로 기억되길" = 전 행정관의 꼼꼼함은 원산지 표시 단속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한 번은 아들과 함께 마트에 빗자루를 사러 갔다가 빗자루에 원산지가 없어 의아하게 여긴 일이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원산지를 찾을 수 없던 전 행정관은 아들에게 원산지를 찾으면 '5000원'을 준다고 약속했다.
"진짜로 약속 지킬거지?"라며 약속을 재차 확인한 아들은 5000원을 받을 마음에 신나서 원산지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 한 채 "원산지 없어도 그냥 빗자루 쓰면 안돼?"라고 풀이 죽어 말했다. 결국 전 행정관은 그 업체에 시정명령을 내렸는데 전 행정관이 일상생활에서 찾아내는 원산지 표시 위반 사례는 적지 않다.
마트에서 원두커피를 사던 중 수입원두의 원산지가 생두가 나지 않는 나라로 표시돼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알아보니 로스팅한 국가를 원산지로 표시해 놓고 있었다. 당시에는 생두를 수확한 나라를 원산지로 표시하도록 돼 있었는데 전 행정관의 발견 덕분에 그 이후부터 수입원두는 로스팅한 국가로 표시할 수 있도록 개선됐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전 행정관은 후배들에게 주말에 장을 보러갈 때도 그냥 다니지 말고 하나씩 건져오라고 농을 건네기도 한다. 평소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런 전 행정관에게 가족을 비롯해 세관에 있는 후배들은 '직업병'이라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투철한 직업정신이 오늘의 전 행정관을 있게 했기 때문에 때로는 엄격한 선배로, 때로는 따뜻한 이모로 후배들을 대하고 있다.
전 행정관은 "엄마가 일만 하다보니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 했다. 딸이 말하길, 초등학교 때 비가 오면 다른 애들은 엄마가 데리러 오는데 나는 어떻게 비를 뚫고 갈까 하는 생각부터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며 "이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이 나지만 여자라고 해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인정받으려고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일할 때는 엄격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대신 후배들과 점심 때마다 배드민턴을 치며 스트레스를 풀고 주말에는 함께 트레킹을 하러가는 것으로 화합을 도모하기도 한다. 외부에서는 직원들에게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라고 하는데 그러면 직원들이 전부 이모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한다고 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신입직원들은 '이모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이차와 상관없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업무를 할 때도 스스럼 없이 물어보는 등 업무 효율이 더 올라간다고.
1975년 관세청에 입사해 40년 가까이 관세인으로 살아온 전 행정관은 "앞으로 재직기간이 2년 정도 남았다. 후배들에게 자상하고 가슴이 따뜻한 선배로 기억되길 바란다"며 "남은 기간동안 최선을 다해서 직장생활을 후회없이 마무리 짓고 싶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