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내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사내유보금'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사내유보금이란 기업이 거둔 이익에서 세금, 배당 등 사외로 유출된 금액을 제외하고 회사 내부에 쌓아둔 자금을 뜻한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 논란은 지난 13일 언론 보도로부터 불거졌다. 언론들은 기획재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 기획재정부가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사내 유보금에 법인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마련해 하반기 경제운용정책에 반영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기업이 배당 또는 급여인상 등의 형태로 사내유보금을 외부로 풀도록 유도, 가계의 가처분 소득확대 및 소비활성화, 성장률 제고로 이어지도록 연결고리를 만든다는 것이 명분.
기재부는 언론보도 내용에 대해서는 공식 해명자료를 내고 정해진 방침이 없다고 밝혔지만 그렇다고 강한 부정도 하지 않는 스탠스다. 지난해 관련 입법안이 야당 의원의 주도로 국회에 제출됐을 때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과는 입장이 다소 달라진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기재부 고위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사내유보금에 대해 과세를 하는 것이 과세원칙에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도 사내유보금에 대해서 과세를 했다 폐지한 적이 있는데, 다시 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 사내유보금, 얼마나 쌓였길래… = 지난해 6월 기준 국내 10대 그룹 82개 상장사의 사내유보금은 477조원으로 2010년(331조원)보다 43.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같은 기간 가계의 저축성 예금 증가율은 16.9%에서 5.5%로 줄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의 기업 사내유보금 문제는 수 년 전부터 해결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되어 왔다. 급기야 지난해 11월 새정치민주연합 이인영 의원 등 12명의 야당 의원들이 사내유보금 과세방안이 담긴 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입법안에 제시된 과세방법은 법이 정한 적정 유보 소득을 초과해 쌓아둔 사내유보금액에 대해 15%의 세율(법인세)을 적용하는 방안이었다. 당장 정부와 여당이 강력히 반대했고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입법이 좌절된 바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정부의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지난 2월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 나선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내유보금에 대해 과세하게 되면 투자(촉진)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배당을 촉진하게 되어 투자가 위축된다"며 반대 입장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 여론 눈치 떠보기? = 기업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는 지난 1991년 비상장사를 대상으로 도입됐다가 실효성 논란에 휩싸여 2000년대 초반 폐지됐었다. 지난해에도 논란 끝에 무산된 사내유보금 과세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정부의 입장 변화가 원인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정기국회 당시만 해도 경제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컸고, 세수부족에 대한 '압박감'의 강도가 다소 덜했다. 특히 경제활성화의 파트너인 기업들이 투자를 하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세부담을 낮게 가져가는 정책스탠스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들어와 세월호 침몰 사태 여파 등 대내외 악재가 겹치면서 예상과 달리 경기 회복이 더뎌진데다 벌써부터 10조원 단위의 세수부족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정부는 국면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킬 수단 마련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사내유보금 과세 문제는 도입 시도 자체만으로 기업들의 엄청난 반발을 살 수 있는 문제. 일각에서는 어떤 수단이든 검토가 필요한 정부가 이 문제를 수면 위로 꺼내올려 여론의 향방을 떠보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전문가들 "사내보유금 과세, 해결책 아니다" = 조세전문가들은 정부의 사내유보금 도입 검토 움직임에 즉각 반대 견해를 밝히고 있다.
기업과 가계의 소득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엔 동의하지만 사내유보금에 대해 과세한다 해도 정부의 생각처럼 자금이 가계소득 증대로 이어지지 않을 뿐 더러, 외국인 주주에게 돌아가는 배당만 늘려 기업경쟁력만 약화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서강대 곽태원 교수는 "기업이 이익을 냈으면 법인세를 부과하면 될 일"이라고 운을 뗀 뒤 "법인세에 배당금액과 유보금액의 차등을 두겠다고 하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과세를 위한 논리가 부족하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는 투자에 관한 촉진이 아니고 배당에 관한 촉진인데 대기업들은 외국인주주가 많다. 이 때문에 이렇게 배당을 촉진해 유보금 분배가 많이 이뤄지면 외국인에게 자본이 빠져 나가게 된다"고 우려를 표했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공공정책연구실 실장 역시 "정부가 사내유보금에 대해서 과세하고자 하는 근거는 불분명한 것 같다"며 "사내유보금에 대해 과세를 하게 되면 과세를 피해서 자본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그럼 해외로 자본을 돌리는 경우도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태규 한국공인회계사회 조세전문위원은 "사내유보금은 현재 회계제도에 의해 평가방식이 많이 바뀌어 미실현이익이 많다"고 전제한 뒤 "자산재평가, 공정가치평가 등에 따른 이익은 미실현이익이라 회사에서 직접 활용하는 부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불가피하게 회계상 이익으로 평가 증대된 부분과 실제 현금 유보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적정유보 초과이득에 대한 제도 활용할 것인지는 몰라도 당시와 회계기준이 많이 바뀐 상황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학수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투자를 하지 않고 쌓아두는 금액 중 일부는 앞으로 지출될 자금이다. 현재는 유보되어있다고 하더라도 향후 지출될 금액이기 때문에 '투자금액'으로 봐야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기업들이 과세를 피해 투자, 배당을 하는 게 좋을지 의문"이라며 "한국경제는 해외의존도가 높아 해외발 경제위기에 취약하다. 유동성 위기가 왔을 때 대처할 수 있는 것은 현금성 자산인데 그 부분이 취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배당여력이 있는 기업들은 대기업이다. 대기업 주주구성비를 보면 소액주주보다는 금융기관, 외국인, 대주주 지분이 크다"며 "대기업들이 배당을 늘린다고 해서 그것이 중산층, 서민에게 흘러들어가 소비로 연결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홍기용 인천대 교수는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금융자산이다. 금융자산에는 이자소득이 발생하고 이에 대해 세금을 낸다. 그런데 여기에 세금을 더 내게 하는 것은 더욱 더 기업경영을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할 일은 투자를 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며 "지금은 세계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더군다나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과도 맞지 않다. 규제완화는 기업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인데, 기업이 세금 때문에 투자를 엉터리로 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사내유보금 문제를 '세금'으로 해소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원색적 비판도 나왔다.
강남대 안창남 교수는 "기업이 사내유보금을 쌓아두든 그렇지 않든 그건 기업에서 알아서 할 일인데, 그걸 세법으로 방지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세법하고는 상관이 없다. 사내유보금을 쌓아놓으면 주주들이 반대하겠지만 정부의 의도처럼 가계에 돈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계와 기업의 소득격차가 벌어진다면 법인세를 증세하면 된다"며 "사내유보금 과세는 세법이 아닌 상법으로 논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