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휴대품, 특송물품, 마약 등 무엇을 단속하든지 상대방이 '나 몰라라' 잡아떼면 애를 먹기 쉽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경우, 상대방이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 사람을 잡아다가 심문할 수도 없고 결국 허탕만 치게 된다.
원산지 단속도 마찬가지다.
소비자가 원산지를 어딘지 모르게 하기 위해 고의로 삭제하거나 오인표시하는 경우 확실한 물증을 잡지 못하면 판매자나 유통시킨 사람에 의한 진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적 없다'고 배짱을 부리면 소득 하나 없이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배영수 서울세관 관세행정관(사진)은 17일 조세일보(www.joseilbo.com)와의 인터뷰에서 "사전 정보가 없으면 사업자가 하는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원산지 단속을 하는데 있어 사전 정보는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배 행정관은 '끈기'와 '인내'도 단속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업체 대표나 직원들이 아니라며 버틸 때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끝까지 설득해 자백을 받아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원산지 단속, 끈기·인내 중요" = 지난 4월 국민신문고를 통해 중국산 선글라스의 원산지 표시가 지워져서 판매된다는 민원이 접수됐다.
배 행정관은 문제가 된 선글라스의 수입업체를 찾아가 판매점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손님으로 가장해 선글라스 판매점으로 가 이런 저런 제품을 구경하는 척하다가 문제가 됐던 제품의 가격을 물어봤다.
직원은 10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라고 했고 배 행정관은 "원산지 표시가 없는데 국산이냐"고 물어봤다. 해당 직원은 "국내에서 주문 생산한 제품"이라는 애매한 답변으로 소비자를 오인하게 했고 배 행정관은 결국 신분을 밝히고 대표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판매점 대표는 해당 제품이 가판에서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원산지를 알 수 없다고 버텼다. 배 행정관이 재고의 원산지 표시를 보겠다고 요구하자 대표는 재고는 전부 집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등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배 행정관은 판매점 직원에게서 들은 정보를 상기시키며 "가판에서 구입한 것이 왜 이렇게 비싸냐. 좀 전에 직원은 국내에서 주문 생산한 것이라고 했는데 생산한 공장이 어디냐. 안경점에서 재고가 한 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계속 추궁하는 등 판매점 대표를 궁지에 몰았다.
끈질긴 추궁 끝에 판매점 대표는 "사실 원산지표시를 지웠다"고 자백했으며 300개를 매입해 70개 정도 팔았고 재고에는 'MADE IN CHINA'로 원산지 표시가 돼 있다고 실토했다.
배 행정관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판매하는 분들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다보니 원산지 손상을 밝히는 것은 현장을 적발하지 않는 한 정말 어렵다"며 "사전정보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사례였다"고 말했다.
이밖에 배 행정관은 유명한 수입산 초콜릿과 사탕을 단속했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배 행정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원산지와 실제 원산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소매포장에는 원산지 표시가 전혀 없었다"며 "대형 수입식품 유통업체로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수입식품 중 원산지 표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기간이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시정을 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시계의 원산지 표시를 살펴보고 있는 배영수 행정관.
□ '인생의 동반자' 만나게 해 준 관세청 = 관세청에 입사한지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배 행정관은 관세청에서 인생을 바꿀만한 계기를 마련했다.
인생의 동반자를 관세청 내부에서 만난 것이다.
배 행정관이 FTA과에서 근무하던 당시 아리따운 여직원이 같은 과로 전입해왔다. 당시 배 행정관 맞은편에 앉아있어 신경도 쓰이고 관심도 커져갔다. 하지만 이렇다 할 진전은 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후에 출장을 함께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급속도로 친해졌고 얼마 전 결혼까지 하게 됐다.
배 행정관은 "관세청이 직장을 넘어 평생 배필도 만나게 해준 정말 고마운 곳이 됐다"고 강조했다.
FTA과에 근무하던 당시 기억에 남는 일도 있었다. FTA 인증 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 건축 자재 수출 건으로 급히 FTA 인증을 받아야 하는 업체가 있었는데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처음해보는 업무라 빨리 처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배 행정관은 업체의 긴박한 사정을 잘 알기에 며칠 동안 늦게까지 남아서 서류를 계속 검토했고 보완해야 할 사항은 업체와 통화를 하며 예정보다 빨리 처리 할 수 있었다.
배 행정관은 "다음해 1월에 업체에서 감사하다며 연하장을 보내줬다"며 "그 당시 힘들었던 기억이 연하장 하나에 제 자신에 대한 대견함으로 바뀌어 뿌듯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연하장 하나에 뿌듯해지는 가슴 따뜻한 '관세인'이자 '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배 행정관.
배 행정관은 "아직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미숙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관세행정 분야를 두루 섭렵해 동료들 사이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물론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 괜찮아'라는 평도 받고 싶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