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한 요인은 뭐니 해도 경제문제였다.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주택가격 하락 등으로 박근혜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여론의 점수는 낙제점이었다.
선거 국면에서 여당에는 분명히 악재였다. 하지만 최경환 신임 경제부총리가 재보선을 앞두고 내놓은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이 선거판을 흔들었다. 재정‧금융자금 41조원 투입과 주택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완화 등을 골자로 한 ‘7‧24경기부양책’에 대해 국민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60%에 달했다.
당장은 실망스럽지만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줬다는 얘기다. “여권에 힘을 실어 줄테니 확실히 경제를 살려놓으라”는 민심의 메시지로 여권은 읽고 있다. “다음 선거가 있는 2016년 4월 총선까지 경제를 살려내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는 새누리당의 상황인식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최 부총리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가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청와대도 경제수석이 경제현안과 정책방향에 관한 월례브리핑을 정례화 하는 등 경제살리기에 드라이브를 걸고 나섰다.
경기부양책에 자극받아 부동산시장이 꿈틀거리고, 코스피지수도 역사적인 박스권을 탈출하려는 조짐도 보인다. 이것이 침체분위기를 반전시켜 기대심리를 높이고 지속적으로 경제주체들의 자신감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최경환경제팀의 경제정책은 ‘소득주도성장’으로 요약된다. 소득이 늘어야 소비가 늘고, 내수가 살아나야 기업투자가 늘고 일자리도 생긴다. 일자리 증가가 개인소득 증가로 이어지면서 선순환 성장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7‧24 경기부양책에는 부동산 등 각종 규제를 푸는 우파식 정책과 기업을 압박해 임금인상과 일자리확충을 유도해내는 좌파식 정책이 뒤섞여 있다. 특히 사내유보금과세 카드는 ‘지도에 없는 길’ 1호 정책일수도 있다.
금융위기 이후 법인세를 인하해 지난 5년간 28조원의 세금 부담을 덜어줬지만 기업들은 투자도 고용도 하지 않고 현금만 쌓아두고 있는 상태다. 가계에 돈이 돌아야 내수를 살릴 수 있고 그러려면 기업들이 임금인상이나 배당확대 등으로 이 돈을 풀어야한다는 취지다. 쌓아두는 현금에는 징벌적 과세를 하고 임금 배당을 늘리면 세금감면 등 인센티브를 부여한다는 정책구상이다. 기업에 돈을 얹어주던 전통적 경기활성화 정책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내수 진작을 위해 41조원을 쏟아 붓고 한은과의 협의를 통한 금리인하 시사 등 금융‧재정에서의 확장정책은 ‘최경환식 양적(量的)완화’로 부를만 하다.
게다가 ‘한 겨울에 한 여름 옷을 입고 있는 부동산시장의 낡은 규제’ 완화는 적어도 내수만은 살려놓고 보겠다는 결연한 정책의지로 읽힌다.
저성장의 함정에 빠져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지도에 없는 길도 가봐야 한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모험이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가 배당을 늘려 가계의 소득 증가로 내수를 진작시킨다는 구상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반강제적 배당은 기업자산을 유출해 투자 여력과 주가를 약화시킨다. 게다가 배당을 늘리면 이득을 보는 건 개인이나 가계가 아니고 외국인 대주주들이어서 국부만 유출된다. 현재 상장기업 중 30% 정도가 적자상태여서 배당을 늘리고 임금을 크게 올려줄 여력이 없다.
국민연금‧보험사‧펀드 등 기관투자가는 배당을 준다고 소비를 늘리지 않는다. 가계소득 증가로 내수가 활성화되고 이것이 기업투자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나마 쌓아온 성장동력을 단숨에 무너뜨릴 위험도 적지 않다.
부동산 규제완화도 같은 맥락이다. 부동산시장을 활성화시켜 가계 자산을 늘리면 부(富)의 효과로 소비가 개선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부동산 가격 상승세가 꺾여 투기적 수요는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LTV‧DTI 규제는 한겨울에 여름옷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규제를 완화한다 해도 집값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지 않으면 빚을 내서까지 집을 사려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부동산 경기 활성화 효과는 스스로 제한된다.
최 부총리가 내놓은 대규모 부양책은 빚을 내 집을 사고, 소비도 늘리고 성장도 하자는 ‘부채 증가에 의한 성장정책’이다. 저출산‧고령화의 급속한 진전 등 변화된 경제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재정의 지속적 확대나 부동산 경기 부양을 통해 단기 성장률을 끌어올려보자는 의욕이 앞서있다.
우리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는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지만 공기업 부채를 감안하면 재정건전도는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부동산시장은 이미 실수요자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매매가가 약세이고 주택시장 중장기전망도 긍정적이지가 않다. 집을 사지 않는 것은 대출을 많이 받지 못해서기보다는 경제침체로 가계소득이 감소하고 있는 데 근본원인이 있다. 빚을 내 집 사기를 권하고, 부동산 자산가격 상승이라는 ‘마약’으로 내수를 진작시키려 든다면 이는 망국적 처방이다.
국제통화기금은 앞으로 수년 내 세계경제 위기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재정지출 확대와 세수 감소로 적자가 누적되고, 기업은 사내유보 감소로 재무구조가 취약해지고,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서는 등 한국경제의 건전성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바깥의 위기가 닥친다면 우리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진정으로 경제를 살리려면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지 않는 근본 원인을 파악해 체계적인 대책을 세워야한다. 소비가 늘어나지 않는 것은 고령화는 진전되는데 미래 소득에 대한 불안감이 크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돈을 쌓아놓고 투자를 늘리지 않는 것은 미래 성장 업종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부양책은 회복의 불씨 살리는 일이 고작이고 불이 활활 붙으려면 기업의 대규모 투자가 따라 줘야한다. 하지만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대기업들이 원화강세와 중국의 추격이라는 이중악재로 휘청거리고 있다. ‘덩어리규제’를 풀어 기업에 멍석을 깔아줘도 시원찮은 마당에 사내유보금까지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니 살겠느냐고 재계는 아우성이다.
지도에 없는 길을 가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보다 급할수록 원칙과 정도(正道)를 걷는 국가적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잠재성장률하락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중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체질개선을 통해 저성장체제에서도 경제안정과 효율을 살릴 수 있도록 경제시스템 및 산업구조를 개편해나가는 일이야말로 항구적으로 한국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