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드레스 커미션'이 뭐길래… = 선박 건조 계약을 체결할 때 선주가 조선소로부터 받는 '어드레스 커미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이지만 이 수수료는 업계의 관행으로 알려져 있고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도 회사에 귀속된 소득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국세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국세청이 과세한 3051억원 중 2063억원만 정당한 과세로 인정하고 어드레스 커미션에 대한 988억원 부과분은 과세결정 취소를 결정한 상태다.
수 천억원의 세금을 둘러싼 국세청과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의 조세소송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다만 양측은 여전히 법원의 판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
추징한 세금을 십 원 짜리 한 장까지 모두 받아내야 한다는 국세청과 단 한 푼도 내지 못하겠다는 권 회장의 소송전은 1, 2라운드를 거쳐 마지막 라운드(대법원)로 옮겨갈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법 행정8부(부장판사 : 장석조)는 지난 9일 권 회장이 반포세무서와 서초세무서, 서초구청 등을 상대로 종합소득세와 지방소득세 도합 3051억원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항소심에서 세금부과는 정당하다며 권 회장의 항소를 기각했다.
다만 권 회장이 받은 '어드레스 커미션(address commission, 선박 건조 계약 체결 수수료)'은 권 회장의 소득으로 볼 수 없다며 부과세액 중 988억원에 대해선 부과를 취소하라는 원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국세청의 항소 또한 기각한 것이다.
양측은 대법원으로 소송전을 끌고갈 태세다.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권 회장은 물론 국세청도 '손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 '선박왕' 조세소송, 쟁점은 무엇? = 국세청과 권 회장이 벌이고 있는 조세소송의 쟁점은 권 회장이 국내 거주자 신분인지 여부다. 국세청은 권 회장이 국내 거주자임에도 국내에 소득신고를 하지 않았다며 2006년~2010년 기간 동안 벌어들인 소득에 대한 종합소득세 2774억원과 지방소득세(지자체 관할) 277억원을 부과했다.
국세청의 어마어마한 세금폭탄에 즉각 반기를 든 권 회장은 자신은 국내에 주소지를 두지 않았으며 주 사업장이 위치한 일본과 홍콩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국세청이 과세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해까지 소득세법은 2년 동안 국내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 대해서만 거주자로 인정해 왔다. 다만 역외탈세 등 거주자 요건을 악용해 탈세를 시도하는 이들이 많아지자 정부는 최근 세법을 개정, 거주자 판정 기준을 1년에서 183일로 축소했다.
권 회장은 개정 전 소득세법을 근거로 2006년 135일, 2007년 194일, 2008년 104일, 2009년 128일을 머물렀다며 국세청의 과세는 부당하다며 지난 2012년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세청은 과세 당시 '국내에서 생계를 같이하는 가족 및 국내에 소재하는 자산의 유무 등 생활관계의 객관적 사실에 따라 판정한다'는 소득세법 시행령을 근거로 권 회장을 거주자로 판단했다.
국세청은 권 회장이 1992년 A빌라를 매입해 전입하고 2004년 시도쉬핑 한국영업소 명의로 B주택을 매입했으며 이 주택에 권 회장과 가족들을 위한 가전집기 등이 완비된 채 유지되고 있는 것을 근거로 권 회장이 국내에 거주기반을 두고 있다고 간주했다.
또한 권 회장이 일본과 홍콩을 오갈 때 항상 국내에 수 일 동안 머무르고 부인이 국내에 있는 모친의 병수발을 든 점, 고교 동창회 등에도 거액의 후원금을 내고 얼굴을 비치는 한편 해외 체류 중인 자녀들이 방학기간 등에는 한국에 머문 점도 판단의 주요 근거로 삼았다.
□ 국세청 손 들어준 법원, 항소는 왜? = 한 두 푼도 아니고 2000억원이 넘는 세금을 내라는 1심(행정법원) 판결에 항소한 권 회장의 입장은 이해가지만 아이러니한 부분은 국세청도 1심 판결에 항소했다는 점이다.
국세청이 1심 판결에 항소한 이유는 법원이 권 회장을 국내 거주자로 인정했지만 또 다른 쟁점인 '어드레스 커미션'에 대한 과세는 부당하다며 과세취소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어드레스 커미션은 선주가 조선소와 직접 선박 건조를 계약할 때 받는 일종의 수수료이다. 업계에서는 선주가 어드레스 커미션을 받는 것은 관행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수수료는 선박을 건조하는 2~3년 동안의 과정을 감리·관리하는데 쓰여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선주가 선박이 건조되는 2~3년 동안 선박을 이용해 소득을 벌어들일 수 없는 점을 감안해 건조기간 동안 사용할 자금을 지원해주는 성격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 회장은 자신의 계좌로 받은 어드레스 커미션을 관리하기 위해 N사를 설립해 자금을 관리하도록 했고 이 자금은 N회사의 소득으로 잡혀 이미 납부했기 때문에 이는 '이중과세'라는 것이 권 회장 측의 입장이다.
하지만 국세청은 국세기본법상 명의자와 실제 소유주가 다를 경우 납부의무는 실제 소유주가 지는 만큼 수수료를 개인 계좌로 받아 유용한 권 회장에게 납부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수료가 N사로 귀속됐다고 하더라도 배당가능 유보소득에 해당하므로 권 회장에 대한 배당간주과세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끝내 국세청의 주장을 외면했고, 국세청의 항소로 이어졌다.
2심 재판부 또한 N사로 귀속된 수수료가 권 회장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국세청의 항소를 기각했다.
□ 국세청-선박왕, 최후의 미소는 누가 지을까? = 국세청과 권 회장은 2심에 불복해 대법원에 항고할 것으로 보인다. 국세청은 이미 어드레스 커미션과 결부된 종합소득세 988억원에 대한 과세를 포기할 수 없고 권 회장 또한 추징세액 3015억원 전액을 인정하지 못하겠단 입장이다.
관세청이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리우던 디아지오코리아와의 5000억원대 조세소송에서 법원의 조정권고를 받아들여 2000억원에 육박하는 세금을 포기(?)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국세청은 과세권을 끝까지 지키려는 모습이지만 문제는 '증거확보'다.
권 회장이 받은 어드레스 커미션이 권 회장에게 귀속됐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만 대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가도 승산이 있는 것이다.
특히 종합소득세와 법인세 탈세, 회사자금 횡령 혐의로 검찰에 기소돼 진행됐던 형사재판에서 어드레스 커미션 횡령 혐의가 무죄로 판결난 것이 행정소송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권 회장은 종합소득세와 법인세 2200억원을 탈세한 혐의 등 조세범처벌법 위반 등으로 검찰에 기소, 형사재판 1심에서 징역 4년과 벌금 2340억원을 선고받았지만 지난해 초 2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대폭 감형됐다.
국세청은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어느 정도 자신있다는 입장이다.
이미 두 번이나 법원이 국세청의 승소를 인정, 사실상 승소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오는데다 서울지방국세청 징세법무국을 송무국으로 개편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고 소송을 준비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는 모습이다.
선박왕 사건의 경우 역외탈세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만큼 국세청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대법원은 1, 2심과는 달리 '법률심'의 성격이 다분해 1, 2심에서 다룬 사실문제에 대한 판단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걸림돌이다.
대법원에서 전심의 결과가 뒤바뀌는 케이스가 매우 제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법조계 안팎에서는 국세청과 선박왕의 소송전이 대법원으로 넘어가더라도 1, 2심 결과와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