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불쌍해지는 것은 남자'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젊었을 때 부인한테 잘해야 나이 들어서 홀대받지 않고 대접받으며 산다는 말이 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나이들어서 깨닫는다고 한다.
하지만 국세청 직원들은 이를 느낄 나이가 되기도 전(?) 벌써부터 가족의 소중함, 특히 부인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는 전언이다.
국세청이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세탁기 한 번 안 돌려 보고 설거지 한 번 안해 본 계장님들과 과장님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혔고 가족 없이 혼자 지내야 하는 외로움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느끼고 있다.
국세청 직원들은 추운 겨울 세종시로 쫓겨나 청사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 가서까지 고생하며 외로움과 사투를 벌인다.
◆…"세탁기 하나에 무너진 자존심" = 국세청 직원들이 가장 많이 사는 푸르지오시티 오피스텔의 내부. 드럼세탁기 자체가 생소한 직원들은 세제를 넣는 방법도 몰라 고생하고 있다고.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해결한 경우는 양호한 편이며 세종시로 이전한 지 한 달이 넘었음에도 서울에 빨래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가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고.
□ "세탁기, 넌 내게 굴욕감을 줬어" = 세종시에 내려온 남자 직원들을 절망에 빠뜨린 것은 바로 '세탁기'였다. 세종시로 내려와 직접 빨래를 해야 하는 세종시 기러기들에게 세탁기, 특히 '드럼 세탁기'는 그들에게 참 낯선 존재였다.
일반형 세탁기는 위에서 뚜껑을 열어 빨래감을 넣고 세제를 넣은 후 버튼을 누르면 됐지만 드럼 세탁기는 세제 투입구가 따로 있다. 그 투입구를 찾는 것부터가 고난이다.
설명서를 보고 세탁기 왼편 위쪽에 있는 세제투입구를 힘들게 찾았지만 세제를 어디다가 넣어야 할 지 또 헷갈린다.
세탁기마다 적게는 두 개에서 많게는 세 개까지 세제 투입구가 나눠져 있기 때문.
여기서 세제를 넣고 끝나면 좋으련만 세제를 넣자마자 밑으로 '또르륵' 흘러내려가 버리는 세제를 보고는 당황해서 부인한테 전화를 건다.
"세제를 넣었는데 세제가 없어져. 세탁기 고장난 것 아니야?"
누가 들으면 저런 상황이 말이 되냐며 웃겠지만 실제 국세청 직원의 상당수가 비슷한 경험을 하며 세탁기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에 다수의 직원들이 세종시에 자리를 잡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주말마다 옷을 싸가지고 서울로 간다는 후문.
일부 직원들은 밤새 가동하는 난방 때문에 집이 건조해져 가습기라도 들여놓고 싶지만 가습기 청소가 귀찮아 그냥 참고 산다고 한다.
◆…"저녁 자리의 마지막은 원룸으로 GO!" =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국세청 직원들인 푸르지오시티 오피스텔은 밤만 되면 술집(?)으로 변한다. 밖에서 1차, 2차까지 한 직원들은 더 이상 갈 데가 없거나 그냥 헤어지기 아쉬우면 동료직원의 원룸을 찾아 술을 마시고 같이 부대끼며 잠이 든다. 세종시의 외로운 밤을 같이 보낼 수 있는 방법이지만 방음에 취약한 오피스텔에 특성상 다른 방에 거주하는 직원들은 새벽까지 이어지는 음주와 고성에 잠 못 이루기 일쑤라고 한다.
□ 외로운 밤이면 밤마다 술잔 기울이며 = 세종시의 밤은 외롭다. 밤에 할 일이 없다. 퇴근해서 집에 가도 반겨줄 사람도 없고 내 몸 하나 뉘일 정도 면적의 원룸은 마치 고시원 같다.
그래서 국세청 직원들은 밤마다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신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마시는 정도로 자리를 마치고 집에 갈 생각을 하지만 대부분 국세청사 주변에서 술을 마시다보니 어디를 가든 국세청 직원들과 마주친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료를 보며 또는 후배를 보며 짠한 마음에 술 한 잔이라도 따라주면 자연스럽게 다른 일행과도 합석을 하게 되고 1차가 아쉬운 이들은 다시 다른 식당이나 술집으로 2차를 가게 된다.
하지만 세종시는 공무원들의 도시답게 어디를 가든 아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술자리는 3차, 4차까지 가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택시가 잡히지도 않고 집에 가기 걱정되는 직원들은 집에서 마음 맞는 직원들이 모여 술을 마신다. 원룸에 안주거리와 술 몇 병을 사다들고 술판을 벌이는 직원들은 집에 갈 걱정이 없다는 생각에 도무지 술자리를 끝낼 생각을 안 한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오피스텔의 특성상 새벽까지 시끄럽게 술을 마시는 소리에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피해자(?)들도 속출하지만 대부분 국세청 직원이라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다고 한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을 마신 직원들은 다음날 구내식당으로 향해 라면으로 해장을 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몸도 축나고 힘들어지면서 대부분의 직원들은 점심 때까지만 해도 "난 오늘 술 안 마실거야"라고 공언하지만 오후 4~5시가 되면 저녁끼니 걱정에 다시 또 '술' 약속을 잡게 된다.
◆…"12층이나 되는 국세청사가 사라진다?" = 세종시 국세청사 건물은 12층이나 되지만 안개가 끼면 언제 있었냐는 듯 한 순간에 사라진다. 오송역에서 출발한 BRT(간선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평소에는 국세청사가 잘 보이지만(사진 左) 안개가 끼면 청사 건물이 아예 보이지 않아(사진 右) 길을 헤매기 일쑤이다.
□ 교통체증보다 더 힘든 것은? = 서울에서의 출퇴근은 교통체증, 만원 지하철과 버스 등 매일 아침이 전쟁 같다.
그에 비하면 길에 차와 사람이 적어 차가 밀릴 걱정이 없는 세종시는 출퇴근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이 들 수 있다. 국세청 직원들도 처음에 세종시에 입성했을 때는 차도 막히지 않고 사람이 적어 식당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안개가 아침 출근길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깟 안개 때문에 출근길이 힘드냐고 말할 수 없지만 세종시의 안개는 서울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짙다.
집에서 국세청사까지 2km 밖에 되지 않는 되는 거리 임에도 청사 건물이 보이지 않아 주변을 뱅뱅 돌았다는 직원부터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은 바로 앞에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아예 보이질 않아 위험을 감수하며 길을 건너야 한다.
심지어는 오송역 KTX가 정차를 할 때도 안개가 끼면 1호차에서 18호차까지가 보이지 않아 역무원이 뛰어다니며 승객이 다 탔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닫는다.
이에 일부 직원들은 영화 '미스트'가 생각난다며 몸서리를 친다.
갑자기 한 마을에 짙은 안개가 내리깔리고 그 속에서 괴물이 스물스물 나타나 사람들을 헤치는 내용의 영화.
국세청 직원은 "안개가 너무 짙어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다"며 "안 그래도 세종시에 차가 적어 차들이 쌩쌩 달리는데 안개라도 짙게 끼는 날에는 사고위험이 배로 높아진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