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외교가 눈치 보기와 경직성으로 실기(失機)와 엇박자를 거듭하면서 궁지에 몰리고 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주한미군 배치문제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놓고 미국과 중국 두 나라 눈치를 보다 어느 쪽의 신뢰도 얻지 못하고 생색은 커녕 실익도 모두 놓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중국의 AIIB 추진과 미국의 사드 한반도 배치는 크게 보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21세기판 격돌이다. 한국은 지금 그 충돌점에 끼여 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AIIB 창설 계획을 처음 거론한 것은 2013년 10월 동남아 방문길에서다.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이다이이루(一帶一路)' 구축 계획을 밝힌 지 딱 한 달 후다. '이다이'(一帶)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뻗는 실크로드 경제대, '이루'(一路)는 동남아를 경유해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21세기 해양실크로드다.
중국은 이제 자신들의 경제력과 영향력을 유라시아 대륙 내부로 뻗치려하고 있다. 미국의 대륙봉쇄전략으로 분절된 유라시아 대륙 내부와 해안의 유기성을 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복원으로 되살려 내겠다는 것이 '이다이이루'다. 이 실크로드 경제권 구축에 필요한 인프라 수요와 향후 교역 활성화를 금융면에서 뒷받침하는 것이 AIIB다.
중국의 이른바 '신대륙주의'에 미국은 전통적인 대륙봉쇄 정책 강화로 맞서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회귀 정책'은 유라시아 대륙의 태평양 연안 봉쇄에 군사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며 한반도의 사드 배치도 그 일환이다.
게다가 중국은 미국주도의 국제금융질서에 AIIB를 무기로 '금융굴기'에 나서고 있고 미국과 일본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으로 중국을 포위하려들고 있다.
미국은 우리의 최대동맹국이고 중국은 우리의 최대교역국이다.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중국의 힘이 커지면서 이런 상황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어 첫 단추를 잘 끼우는 일이 더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드와 AIIB 두 현안에 대한 우리 외교․안보팀의 대응은 전략부재에다 엎치락뒤치락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우리 정부는 사드의 한국 배치 가능성을 일관되게 부인하며 '한국형 미사일방어체제'를 고수해 왔다.
그러나 10월 한민구 국방장관의 '전략적 모호성' 발언이 혼란을 부추겼다. 논란이 증폭되자 청와대대변인이 "요청이 없었기 때문에 협의도 없었고 결정된 것도 없다"고 입장을 발표하더니 일주일도 채 안 돼 국방부 대변인은 "미국 정부가 결정해서 협의를 요청해올 경우 군사적 효용성, 국가 안보이익을 고려해서 우리 주도로 판단하고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요청하면 사드 배치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부정→전략적 모호성→부정→부분 긍정'으로 바뀌어 온 것이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로 북한 핵과 미사일 공격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지, 다른 대안은 없는지, 중국의 반대에는 어떤 허점이 있고 미국의 압박에 동맹의 함정은 없는지 등등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 면밀히 따져 우리의 입장부터 당당하고 확고하게 정립했어야 했다.
AIIB 가입문제는 더 어이가 없다. 지난해 7월 서울의 미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AIIB 가입을 한국에 요청했다. 박대통령은 한중FTA에는 화답했지만 AIIB가입은 의제에서 뺐다. 미국의 반대 때문이었지만 한국 정부는 이 때 전향적인 의지를 표명했어야 했다.
중국의 AIIB 구상은 도로, 철도, 항만, 공항, 통신, 전력 등 아시아지역 인프라 투자수요에 비해 자금 공급이 부족하다는 데서 출발했다.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있긴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부족하다. AIIB가 출범한다면 아시아지역의 인프라 개선에는 분명히 청신호가 켜진다. 이는 우리가 그간 공 들여온 동북아지역 인프라 개발 구상과 맞아떨어지고, 박근혜 정부가 내건 유라시아․드레스덴 구상과도 맥이 통한다.
어차피 한국이 가입을 한다면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서방국가들이 가입하기 전에, 중국이 정말 애가 달 때 결정을 했어야했다. AIIB 창립회원국은 35개국을 넘어설 전망이고, 세계은행과 IMF(국제통화기금)마저 협력 및 합작을 자청하고 나섰다.
중국은 이제 한국이 AIIB에 들어오든 말든 크게 괘념치 않게 됐다. 한국의 선택은 중국이 짜놓은 판에 막판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선제적이고 전략적이었어야 했다. AIIB의 사무국을 중국이 아닌 한국에 유치한다는 협상카드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아시아 금융패권을 놓고 미·중·일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AIIB는 일본이 주도하는 ADB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은행·IMF 등이 잇달아 AIIB와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은 협력을 명분으로 AIIB가 중국 측 도구로 활용되는 것을 최대한 막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몽니'를 부리다 '굴욕'을 당한 미국은 영국 등 동맹국을 통해 중국 투표권 확대를 억제하려 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AIIB 가입 후에도 양측 눈치를 보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외교적 패착이다.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도 시기를 놓쳤다. 이 역시 중국을 의식해 정부는 아직 가입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일본 등 12개국이 곧 협정을 타결하면 일본에 선점 효과를 다 뺏기게 된다. "지금이라도 들어가겠다"는 뒤늦은 신호에 미국은 "나중에 보자"고 한국을 외면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맞붙는 군사․경제적 패권경쟁의 격랑을 헤쳐 나갈 확고한 전략 틀이 우리 외교․안보팀에게서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통일대박이나 일본의 역사인식 전환 필요 등 교과서적 언급만 되풀이하고 있다. 워싱턴에서 '한국 피로증'이란 조어가 생긴 지 오래 됐음에도 대일 전략은 그대로다.
오죽하면 사드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AIIB는 중국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는 '빅딜'설까지 나돌았을까. 이럴 경우 양쪽 모두에게서 고마움은커녕 신뢰만 잃을 뿐이다.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말을 국방장관이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은 대한민국이 미 중 양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광고하는 것으로 이를 '전략'이라고 할 수가 없다.
사드를 어디에 배치하든 중국 미사일은 포위된다는 것을 중국이 모를 리 없다. 중국의 사드 반대는 한·미를 떼어놓기 위한 전술적 측면이 더 강해 보인다.
사드 배치는 남북한 군비 경쟁을 촉발하고 한반도 군사 긴장을 고조시킬 우려가 크다. 최선의 방책은 남북한 간 군사적 신뢰 구축을 통해 북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제거 또는 축소시키는 길이다. 남북한 관계개선을 통해 한반도정세를 우리가 주도할 수 있어야 사드배치든 유라시아 인프라 진출이든 우리의 자주권과 전략적 유연성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