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2010년 ‘만추’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고 이만희 감독의 1966년작 ‘만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미국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두 배우 현빈과 탕웨이가 짧은 3일간의 만남을 통해 가슴 아린 로맨스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탕웨이는 살인죄로 7년 만에 휴가를 나온 죄수를 연기하였고, 감독 김태용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2번이나 리메이크할 정도로 명화인 ‘만추’를 1966년 가을, 나는 운 좋게 개봉 당시 극장에서 감상했었다. 40년이 넘게 흘렀지만 지금도 영화 속 추억의 장면은 아직도 기억 속에 아련하다. 1975년 45세의 이만희 감독은 영화 편집실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귀로’ ‘삼포 가는 길’등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낸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온 국민이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면은 창경궁이었다. 무엇이 ‘만추’를 이토록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했을까. 나는 당대의 기술과 정서의 조합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1960년 대 ‘만추’의 정서를 오직 흑과 백뿐인 흑백영화에 담아냈기에 오랫동안 가슴 저린 명장면으로 남은 것이다.
영화‘만추’는 필름이 사라져 다시 볼 수 없는 명화가 되었고, 그렇게 이만희 감독과의 인연이 끝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구명시식을 하다 보면 영가들이 이만희 감독 작품을 보여 달라고 청할 때가 있다. 죽어서도 그의 작품을 잊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감독 작품뿐만 아니라 1960~70년대 영화들이 영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덕분에 흑백영화를 더욱 좋아하게 됐다. 흑백영화는 세련된 맛은 없어도, 순수하고 아련한 감동을 고스란히 선사한다.
오랫동안 소장한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을 구명시식에서 공개한 적이 있다. 사람이 아닌 영가를 위해서였다. 구명시식이 예정돼 있던 영가는 며칠 전부터 계속 나타났다. “좋은 그림을 갖고 계시다면서요. 구명시식 때 꼭 보여주세요.”
지음(知音).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인인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종자기(鍾子期) 뿐이었다는 말처럼, 예술은 단 한 사람이라도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림을 비록 제한된 공간이지만 예술과 문화를 사랑했던 영가를 위해서 잠시나마 공개했다.
“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좋은 그림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순간 나는 작품이 제 가치를 알아주는 종자기(鍾子期)같은 이를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빌 게이츠는“컴퓨터가 책을 대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래 된 흑백영화처럼 책 역시 그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남을 것이란 얘기다. 아마 화려함은 없어도 가공하지 않은 진실한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최신 디지털 기술이 세상을 지배해도 사람의 영혼까지 아우를 수는 없다. 기계에 지배되지 않는 영혼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