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큰 인연을 맺은 언론인
대학로 선원을 들어서면 우측에 길게 서 있는 지팡이가 있다. 도선국사의 주장자이다. 내가 주장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8년의 일이다. 그해 어느 날 한 부인이 선친의 유언으로 내게 전할 물건이 있다고 대학로 선원을 찾아왔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까만 옻칠이 잘 된 주장자였다.
주장자(柱杖子)는 선사(禪師)들이 좌선할 때나 설법할 때 지니는 지팡이다. 머리까지 오는 장정 팔뚝 굵기의 곧게 뻗은 검은 옻칠이 된 주장자는 어찌 보면 도깨비 방망이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집 한 채를 거뜬히 떠받칠 수 있는 묵직한 기둥 같았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주장자를 보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계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개태사(開泰寺) 부근에서 나온 주장자라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천년이 넘어 다시 세상에 나온 주장자는 잘 썩지 않는 재질 위에 옻칠을 해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고인은 주장자에 정성들여 다시 옻칠을 입혀 그동안 둘도 없이 소중한 보물로 애지중지 보관해왔던 것이다.
내가 고인을 처음 만난 건 그 분이 ‘L국장’으로 모 일간지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다. 어느 날 그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L국장에게 “큰 신문사 사장을 두 번 하실 것 같고 오래 하실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L국장은 “에이, 제가 그럴 일이 있나요. 우리 신문사에서 편집국장은 사장이 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면서 덕담 정도로 생각하고 웃어 넘겼다.
그 분은 내게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차 선생은 젊은 사람으로서 도의 모양새를 크게 갖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교도 아니요, 도교도 아니요, 내가 도무지 정의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나중에 나와 큰 인연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분의 행적은 후문으로 간간히 전해 듣긴 했으나 두 번 다시 대면은 없었다.얼마 후 그 분은 한국경제신문 사장이 되었고 10년 가까이 최장수 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후 문화일보 사장이 되었다. 이후 주요 언론사 간부를 역임하며 국내 최초의 무료신문을 창간했다. 언론의 개척자로서 뿐만 아니라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하고 단전호흡과 다도(茶道)에도 조예가 깊었다. 노년이 무색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2008년 9월 L회장이 타계하였다. 갑작스런 죽음이라 미처 가족에게 제대로 된 유언을 남기지도 못했다. 고인은 생전에 나와 친분이 있는 P씨에게 “차 선생에게 이 물건을 전해 주었으면 합니다”고 말했고, 그날 따님이 나에게 주장자를 전한 것이다.
주장자를 전달받은 자리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당신은 왜 자기를 따르던 많은 후학들을 뿌리치고 최고의 보물을 내게 줄 생각을 했을까. 내가 이것으로 무엇을 하란 말인가.’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7년이 지난 지금도 커다란 숙제를 떠안고 있으며 조금은 그분의 뜻을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