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로 지구촌이 하나로 묶여지면서 ‘질병의 세계화’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작년 8월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에볼라는 10개국에서 2만7181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1만1162명이 숨졌다. 2003년 우리를 긴장시켰던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홍콩에서 비롯돼 중국·대만 등 중화권 국가들을 넘어 37개국으로 퍼져 2003년 한 해 동안만 9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일대에서 발병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MERS)는 한국에서 확진 환자가 나온 지난 5월 20일까지 전 세계에서 1154명의 발병자, 471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전체 감염 환자의 97.6%는 중동지역에서 발생했지만 아시아·유럽 등 14개국에서도 발병과 사망피해가 속속 보고되고 있는 중이다.
전염성 바이러스는 이전까지는 특정 동물 집단 속에서 같은 종끼리만 주로 전염되어왔다. 이들이 사람과 접촉하면서 사람 몸속으로 침입해 사람과 사람을 감염시키고 있다. 사스(사향고양이)·조류인플루엔자(조류)·에이즈(원숭이)·에볼라(과일박쥐)․메르스(낙타) 등 모두 동물에만 있던 바이러스들이 사람 몸에 침입해 감염시킨 예다.
세계화가 뜻하지 않게 바이러스와 사람간의 적대적 공존을 부추기고 있어 지구촌은 이들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각오해야한다.
동물원 외엔 낙타가 한 마리도 없는 우리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메르스 발생국이라는 오명을 톡톡히 쓰게 된 것은 실로 아이러니다. 상위 5위권 국가 중 우리를 제외하면 모두 중동 국가들이다.
사스 사태 때 한국은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사스 예방 모범국’이란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사스의 경우는 홍콩과 중국에서 먼저 유행이 진행됐고, 우리는 검역을 강화해 의심자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이번처럼 사스 감염자가 잠복기 때 국내에 먼저 들어왔다면 그 환자가 입원한 병원을 중심으로 유행이 퍼졌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바이러스와의 공존에 따른 질병 감염 피해는 급속도로 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의학적 대처는 역부족이다. 메르스와 사스를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변종만 100여 가지가 넘고 각각의 치료백신을 전부 따로 개발해야 한다는 난점 때문에 경제성을 따지는 제약회사들이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국가들에서 주로 기승을 부리는 에볼라 바이러스 역시 시장성을 이유로 민간 제약회사들은 백신 개발에 주저하고 있다. 메르스의 경우 쥐를 메르스에 감염시킨 뒤 치료제와 백신을 찾아내는 임상실험이 미국에서 진행 중이다.
언제 어떤 바이러스에 노출될지를 모르는 ‘질병의 세계화’ 시대에 감염피해를 최소화하려면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신뢰받을 수 있는 보건방역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거미줄 같은 글로벌 항공교통망이 전염병 확산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면 인터넷은 정보 유통 환경을 바꾸어놓았다. 과거에는 쉽사리 통제되던 정보도 인터넷, 특히 SNS를 통해 확산된다. 쉬쉬하던 정보나 거짓 해명이 곧 들통 나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하는 일이 생긴다. 메르스 바이러스가 한국에 들어 와 변이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중국당국의 분석결과가 우리 당국 발표보다 먼저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는 세상이다.
메르스는 2012년부터 우리와 교류가 많은 중동지방에서 유행했기 때문에 언제든 감염자가 국내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조기 감지하는 감시체계를 갖추었어야 했다.
하지만 “개미 한 마리 못 지나가게 하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우리의 감시체계는 ‘낙타가 지나갈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렸다.
‘정상적 건강 상태의 사람이면 독감이나 폐렴 수준에서 극복이 가능하다’는 메르스가 우리사회에서 왜 이토록 심한 공포와 패닉을 몰고 왔을까.
위기 및 위험관리의 요체는 소통과 그를 통한 상호 신뢰다. 그럼에도 보건 및 방역문제에까지 불통(不通)과 비밀주의로 초동대처의 골든타임을 놓친 데 근본원인이 있다.
초기 대응 과정에서 감염자와 의심 환자의 초동 격리에 실패했다. 최초 감염자가 확진 판정을 받기 전까지 세 곳의 병원을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수십 명이 감염됐다. 의료기관 간 확진 환자와 의심 환자들에 관한 정보를 공유해야 또 다른 의료기관 내 전파를 막을 수 있는데도 정보 공유가 안 돼 무방비로 감염사태를 불러왔다.
관련 병원의 반발과 시민 불안을 이유로 정부는 18일 동안 병원과 감염경로 등 관련 정보를 비공개로 일관했다. 시민들은 사적 정보유통에 의존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유언비어와 ‘괴담’이 판치며 정부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괴담이 사회를 혼란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당국의 무능한 대처로 혼란해진 사회가 괴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가 격리 대상자들은 개인적인 임의 행동과 가족 간 감염을 막기 위해 밀착관리가 필수적이다. 당사자들의 성숙한 시민의식 못지않게 격리대상자와 그 가족, 국민 일반에게 이해와 적극적인 협조를 구하는 소통노력도 긴요하다.
대중의 ‘메르스 공포’에 대해 너무 호들갑을 떤다느니, 감기수준에 과잉 대응이라는 비난도 쏟아진다. 의학적으로는 맞는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와 일반인은 위험을 인식하는 기준 자체가 다르다. 감염성 질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심리적·사회적 요인의 영향이 더 크고, 그래서 의학은 사회과학이란 말도 있다.
위험에 대응하는 전문가 집단은 냉철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되, 정부와 국가지도자는 대중의 두려움을 보듬고 솔직하게 대화하며 안심시킬 책임이 있다.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내가 집니다.” “정부는 국민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라는 영화 ‘감기’에서 대통령 역을 맡은 차인표 씨의 대사를 많은 국민들이 떠올리는 이유를 청와대는 헤아려야 한다.
‘의료한류’로 상징되는 의료선진국 한국이 졸지에 ‘메르스 민폐국’으로 전락한 이유는 어디 있을까. 의사들 개개인의 능력과 의료수준은 높지만 국가단위로 시스템화가 잘 안 돼 있다는 자책도 의료계에서는 쏟아진다. 대형병원 쏠림 현상과 시장바닥처럼 북적대는 한국의 ‘간병문화’도 도마에 올랐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민간 의료기관 만으로는 안 되고 공공 보건의료체계를 개선해 국가적 대처능력을 확충해야한다.
메르스를 극복해도 감염병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메르스 보다 메르스공포가 더 무섭듯 감염병 바이러스보다 우리사회에 구조화된 불신과 괴담, 사회적 냉소가 패닉을 불러오는 ‘불통 바이러스’가 더 무섭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휘둘리지 않으려면 사회적 건강성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첫 걸음은 국가리더십의 솔선과 국민대중과의 철저한 정보공유 및 소통임을 우리 모두 깨달아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