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촉발한 정국 혼란이 점입가경이다. 여당은 의원총회에서 박 대통령의 뜻을 존중해 재의결을 위한 본회의 표결에 불참하기로 당론을 정했으나 유승민 원내대표를 재신임함으로써 사실상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했다.
대통령이 이에 ‘격노’ 하고, 청와대와 친박계 의원들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유 원내대표를 퇴진시키겠다”고 압박하고 나서면서 내전에 돌입한 상태다.
새누리당은 긴급 최고위원회의까지 열며 유 원내대표의 거취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회의 분위기는 유 원내대표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기울었고, 김무성 대표도 사퇴 불가피론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유 원내대표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최고위원들의 의견을 잘 경청했고 계속 고민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자신의 거취가 더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당과 국가, 정치 발전의 대의명분이 걸린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게다가 비박계 초·재선 의원 21명이 성명을 내고 “여당 의원이 뽑은 원내대표를 청와대가 사퇴하라는 것은 과거 군사독재 정부 시절 때의 얘기 같다”며 ‘유승민 지키기’에 나섰다. 여권의 내홍이 진정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예상대로 야당의 반발도 거세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정작 국민으로부터 심판받아야 할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라며 국회 상임위 일정을 전면 거부하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국회법 개정안의 재의(再議) 일정이 오는 6일로 잡히면서 국회일정 올 스톱사태는 면했지만 새누리당의 표결불참 방침을 둘러싸고 여야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대처와 경제활력을 되살리기 위한 추경예산 편성 등 당면 현안에 관한 당정협의가 열렸지만 여당 원내대표가 사퇴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힘이 실릴지는 의문이다. 그에 따른 최종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돌아온다.
경기가 하강국면으로 들어섰다는 신호는 연초부터 나왔다. 5월 하순부터는 메르스 충격이 더 해져 민간경제연구소들은 올해 성장률이 2%대로 떨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메르스 사태로 관광객이 급감해 공항이 텅 비었고, 소비자심리지수는 2년6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는 국회 탓, 여당은 청와대 탓, 야당은 대통령 탓만 하며 각을 세우고 있다. 정작 ‘배신의 정치’는 국민들이 대통령과 국회를 향해 해야 할 말로 들린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헌법에서 보장한 권한이므로 시비를 걸 게 없다. 국회는 재의 절차를 밟고 가부를 결정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거부권 행사에 따른 정치적 후유증을 최소화해야할 대통령이 오히려 야당은 물론 정치권 전반과 큰 싸움을 작심하고 나섰다는 데 있다.
당리당략에 따라 상관도 없는 법안을 연계하는 빅딜과 ‘끼워팔기’ 행태를 비난한 것은 일견 수긍이 간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기서 한 참 더 나아가 ‘난센스’ ‘구태’ ‘패권주의’ ‘배신자’ ‘국민의 심판’ 등등 정치인과 국회를 전면 부인하는 ‘분노의 언어’들을 쏟아냈다. 집안사람인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선 ‘자기의 정치 철학과 정치 논리에 정치를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여권의 내홍은 당청 간 소통과 신뢰의 실종 때문이다. 여권 내부의 불통과 불신은 어느 한쪽의 책임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배신적 행태’에도 문제가 있지만 박 대통령과 청와대도 불통과 불신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은 나라가 이 모양인 것이 민생 법안을 통과시켜 주지 않은 국회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에 더 실망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서비스산업 발전 기본법과 관광진흥법 등을 문제 삼았다. 경제활성화 법안들이 국회만 가면 발이 묶여서 정부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 원내대표는 경제활성화법 30개 중 23개가 처리가 됐고, 이제 5개 정도 남은 법은 야당이 제일 강하게 반대하는 법들임을 강조했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여야를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은 여당을 향해선 숙제를 내주듯 법안 처리만을 일방적으로 주문했고, 야당과의 대화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청와대와 여야 대화가 절실한 상황인데도 대통령은 한 달 넘게 대화 창구인 청와대 정무수석조차 임명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은 그동안 여당과 얼마나 소통했는지 뒤돌아봐야 한다. 김무성 대표의 경우 취임 이후 대통령 독대는 한 차례에 불과했다. 전화소통은 한계가 있는데 그것마저 부족하다.
국회법 혼선이 유 원내대표만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 국회선진화법에 발목 잡혀 야당에 끌려 다니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대(對)국민 기자회견이나 야당 지도부 설득을 한 적도 없다.
국회법 개정안은 여야가 합의해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고,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를 거친 뒤 절대다수의 의원들이 자유의지로 이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국회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 대통령과 대립하는 건 국정 혼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통령의 개인감정 때문에 여당 원내대표를 갈아치우는 것이 온당한지도 의문이다. 한 여론조사에서 유 원내대표 퇴진 요구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답이 58.5%로 ‘공감한다’(32.9%)보다 배 가까이 더 많이 나왔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물러나도, 물러나지 않더라도 그 후폭풍은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메르스 사태와 경제 추락, 4대개혁과 외교·안보 분야의 대형 도전이 중첩된 상황에서 대통령이 민관과 기업, 정치권의 합심을 호소해도 모자랄 판에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치권을 심판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분노의 정치’는 우리 모두를 패자로 만들 우려가 다분하다.
경제살리기는 고도의 정치다. ‘분노의 정치’가 아니고 막후협상과 협의, ‘주고받는 큰 정치’로 풀어야한다. 당·정·청간 여·야간 소통에 앞서 대통령의 국정운영부터 정상화해야 한다. 메르스 파문 때 보건복지부 장관의 대통령 대면(對面) 보고가 최초 확진 환자 발생 이후 6일 만에 이뤄졌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장관의 존재감이 떨어지고,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대기업이 구멍가게 운영하듯’ 몇몇 측근에 의존한다는 날선 비판도 이어지는 판이다.
지금의 여권 내분이 정리될 때까지는 국회와 국정이 겉돌 수밖에 없다. 민생 법안은 커녕 다급한 경기 부양 추가경정예산의 국회통과마저 불투명해졌다. 국정은 안중에도 없는 여당의 권력싸움이야말로 박 대통령의 말대로 선거로 심판해야 할 사안이다.
대통령이 분노를 추스르고, 지금부터라도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당청과 야당 및 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꾸려갈 것이며, 경제활성화와 개혁 등 주요 국정 현안에 관한 사회적 대타협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에 관한 새로운 그림을 내놓아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