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들의 업무영역 확대 움직임에 세무대리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기장대리와 더불어 세무사들의 수익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외부세무조정' 업무를 변호사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대법원은 세무사등록을 한 변호사들이 소속된 K법무법인이 세무사들의 세무조정반 지정신청을 거부한 처분은 부당하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K법무법인) 승소 판결을 내렸다.
아울러 이날 대법원은 세무사 등이 작성한 세무조정계산서를 제출하도록 강제하는 법인세법과 소득세법의 시행령(대통령령) 및 시행규칙(기획재정부장관령)은 모법(법인세법과 소득세법)의 위임범위를 벗어난 것으로서 '무효'라고 판결했다.
앞으로 유사한 상황의 법무법인이 각종 세금신고 시 세무조정을 위한 조정반을 신청할 경우 이를 거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외부세무조정제도를 지금처럼 시행령에 위임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것 역시 잘못됐다는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외부세무조정제도 존재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 판결에 따른 일부 변호사들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번 판결은 법무법인의 조정반 신청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 뿐 세무조정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정제도에 큰 변화는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세무사 업계의 우려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 소송 능력 갖춘 법무법인, 세무조정 시장 잠식하나? = 이번 판결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지난 2003년 12월31일 이전에 세무사 등록을 한 변호사를 보유한 K법무법인은 2000년부터 매년 세무조정반 지정을 받아왔다.
하지만 2011년 대구지방국세청이 "법무법인은 세무조정계산서를 작성할 수 있는 조정반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K법무법인에 조정반 지정 취소를 통보했다.
이에 K법무법인은 법인세법 시행규칙 등이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반한 무효 규정이라며 소송을 냈고 1·2심은 "시행규칙 조항이 세무사법 등 상위법과 헌법상의 평등원칙에 위배된다"며 K법무법인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반드시 법률에 뚜렷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점을 선언한 것"이라며 "국회에서 외부세무조정 강제제도 도입 여부나 변호사와 세무사 등 전문직역의 이해관계 문제가 논의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 세무사에 따르면 외부세무조정에 따른 수수료는 수임 업체의 매출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한 업체당 1년에 수백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수익을 올릴 수 있을 만큼 세무사들에겐 중요한 '먹거리'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세무조정은 세무사 입장에선 다른 전문가 단체에 결코 내 줄 수 없는 고유의 업무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이번 외부세무조정에 대한 판결과 법무법인의 세무 관련 업무 영역 확대 움직임에 세무사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24일 한 세무사는 "법무법인 중 일부는 세무팀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 먹거리가 줄어든 법무법인이 세무 업무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납세자들이 평소 수임을 맡기는 세무법인에 조정을 맡기려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도 않다. 규모가 영세하면 법무법인에 조정을 맡기려는 생각을 못할 수도 있지만 규모가 중견 이상으로 커지면 법무법인 소속 세무팀이 나중에 소송에 관련된 사건까지도 미리 커버할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장대리 업무와 세무조정 업무가 반드시 맞물려 돌아가지는 않으며 오히려 규모를 갖춘 업체는 향후 소송 등 미구의 사태를 염두, 법무법인에 세무조정을 맡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
그는 이어 "세무사회에 회원으로 등록하기 위해 변호사가 세무사 교육신청을 문의하기도 한다"며 "변호사들이 직접 세무 업무를 하지 않더라도 세무사들을 고용해서라도 할 것"이라고 전했다.
□ "세무사 타격 없다" 회계법인-법무법인 다툼? = 하지만 일각에선 이번 판결이 세무사들, 특히 규모가 작은 세무사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오히려 규모가 있는 회계법인이 세무법인보다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 세무사는 "변호사들이 얼마나 자주 세무조정을 할지 의문이 든다"며 "기존의 업무를 포기하지 않고 서야 쉽지 않을 듯하다. 만약 한다면 세무사를 채용해서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오히려 세무사를 찾는 법무법인의 수요가 많아지면 젊은 세무사들이 법무법인에서 연봉도 올리고 취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동안 국제조사 분야에서만 있던 세무사 수요가 이번 기회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적인 메세지를 전했다.
아울러 그는 "세무법인 보다는 회계법인에 타격이 있을 것 같다. 회계법인 세금팀에서는 A급 거래처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번 건은 회계법인과 법무법인의 대결이될 듯하다. 세무법인은 일부 큰 법인을 제외하고는 타격이 없을 듯하다"라고 덧붙였다.
□ 전화위복(轉禍爲福) 세무사회 "세무조정, 법으로 못 박겠다" = 외부세무조정이 존폐 위기에 놓였다는 소문이 돌자, 세무사회는 불안에 떨고 있는 회원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무사회는 이번 판결이 난 20일 즉시 회원들에게 공문을 통해 "외부세무조정제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행령 및 시행규칙에 규정되어 있던 외부세무조정제도를 법률인 법인세법과 소득세법에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며 역공에 나섰다.
이번 기회에 외부세무조정제도를 시행령이 아닌 법으로 못 박아 더 이상의 잡음을 없애겠다는 것.
세무사회는 이어 "대법원 판결로 훼손된 외부세무조정제도가 조속히 회복될 수 있도록 기획재정부 세제실에 해당 법률의 입법보완에 대해 우선적으로 협의하면서 국세청에 대해서도 법률 개정에 대해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해당 법령에 대한 입법보완을 추진하면서 다시는 타 자격사(변호사 등)가 세무사의 직역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관련 규정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세무업계에선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등 전문자격사 단체들 간의 업무영역 다툼은 이제 시작이라는 목소리도 흘러 나온다.
한 세무사는 "로스쿨로 인해 포화상태에 이른 변호사들의 공세는 나날이 거세질 것"이라며 "이번 대법원 판결 뿐 아니라 곳곳에서 업무영역 다툼의 징조가 이어지고 있다. 한정된 파이를 어떻게 나누게 될 것인 지 관계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