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지혜를 상징하는 붉은 원숭이의 병신년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경제전망은 온통 잿빛이다. 올해 세계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을 기록했던 작년보다 더 안 좋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국경제도 작년보다 성장률이 더 떨어지면서 2%대 성장이 고착화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개혁을 반드시 완수해 미래 30년 성장의 든든한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재다짐했다. 같은 다짐을 거푸 되풀이할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실천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없다.
저성장이 고착화되면서 저출산·고령화, 사회양극화, 가계부채, 청년취업난, 노사갈등 등 극복해야 할 경제·사회적 난제들이 겹겹이 쌓이고, 이들이 서로 맞물려 복합작용을 일으키면서 나라경제를 불시에 위기로 몰아넣을 위험도 커지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스스로 “한 순간에 잘못될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내놓고 말할 정도다.
국가는 국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명운을 걸고 생존게임을 벌여야 할 상황인데도 대통령의 판에 박힌 입법타령, 정치권 탓하기는 정말 답답하고 짜증스럽다.
게다가 우리의 아킬레스건(腱)인 ‘5대 절벽’이 새해에는 본격화할 것이라는 경고도 잇따른다. 재정 지출이 줄어들면서 나타날 ‘재정 절벽’, 소비활성화 대책의 종료에 따른 ‘소비 절벽’, 정년 연장으로 청년 취업난이 가중될 ‘고용 절벽’, 쓸 만한 정책 카드가 바닥난 ‘정책 절벽’, 그리고 올해로 생산 가능 인구가 정점을 찍는 ‘인구 절벽’이 그것이다.
한국경제의 저성장과 위축은 “중국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수출 주도 국가의 대표적 실패 사례”라는 바깥의 지적도 주목을 끈다. ‘경제영토 확장’ 운운하며 자유무역협정(FTA)체결에만 매달렸을 뿐 기업경쟁력 약화로 기술과 품질에서 중국에게 밀리고 가격경쟁력에서 일본에게 뒤처지는 현상에 체계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글로벌경기침체의 영향은 어느 나라나 겪는 일이지만 우리 기업들의 핵심기술 역량 미비가 침체의 근본원인이라는 점이 심각하다. 과거에는 일본 기업의 기술력과 중국 기업의 저가 공세에 끼어 고전했다면 지금은 빠르게 성장한 중국의 기술력에 쫓기고 일본의 가격 경쟁력에 밀리는 ‘신(新) 넛 크래커’ 상황이 보편화되고 있다.
중국의 추격에 대비해 신산업 육성과 기존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서둘렀어야 했지만 현재의 과학기술수준으로 이를 이룰 수 없다는 데 바로 우리의 고민이 있다. 연초 기업최고경영자와 경제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한국경제 위기요인 조사에서 54.7%가 ‘기업의 수출경쟁력 상실’을 지적한 반면 정부가 목을 매고있는 노동개혁, 즉 비효율적 노동시장을 꼽은 CEO는 정작 13.9%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규모를 막론하고 기업의 성장성과 수익성이 전반적으로 정체되는 장기 불황 징후가 두드러지고 있다. 위기 속에서 내실을 다지면서 생존을 위한 선제적인 구조조정과 사업개편, 새로운 먹거리사업 창출에 안간힘을 쏟아야 할 때이지만 주요 그룹들의 새해 경영계획에서 공격적인 성장 목표를 제시한 곳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증권업계 4위로 2위 대우증권을 인수한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은 “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도전정신 부재다. 가장 모험적이어야 할 자본시장조차 도전과 투자를 두려워하고 있다”며 “기업은 투자를 전제로 살아가는 존재다. 지금처럼 기업이 투자를 안 해서는 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파나소닉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호황은 좋지만 불황은 더욱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불경기라고 움츠러들기만 한다면 정작 호황기가 돌아왔을 때 과실을 따 먹지 못한다. 그래서 기업들의 승패는 호황기보다 불황기에 결정 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일본에선 구조조정과 업종 간 이합집산이 활발하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고 있다. 총수의 부재 또는 사생활 스캔들, 형제간 법정소송 등 오너 리스크가 회사경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우리 현실이 답답함을 더 한다.
중국 기업의 도전 속에 스마트폰·TV와 같은 주력 제품의 수익성이 낮아져 비상이 걸린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전자업계는 신성장사업 발굴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삼성의 경우 기술혁신 전략을 쓰기엔 너무 늦었고, 결국 쌓아놓은 현금으로 버티면서 시간을 버는 파이낸스전략이 고작이라는 지적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중국․인도 등 신흥국자동차 업체들이 신형 저가차 시장을 공략하면서 신흥국 기반으로 10년 동안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 지위를 구축해온 한국 차의 근간도 흔들리고 있다. 고급브랜드 제네시스로 활로를 개척하려는 현대차의 몸부림이 다급해 보인다.
뼈를 깎는 구조 개혁으로 체질을 고치고 혁신의 힘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드는 것 밀고는 달리 길이 없어 보인다. 고용을 떠받쳐주던 자영업이 시장포화로 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해 취업증가의 길이 막혔고 취업해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용불안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경제활성화도 일자리도 양극화 해소도 가계부채문제도 투자를 통한 경제성장이 근원적인 해답이다. 비주력산업은 과감히 떨쳐내고 핵심사업에 투자와 역량을 집중해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 나가는 길 밖에 없다.
국가 비상사태라는 비장한 상황 인식 아래 정부와 정치권은 구조 개혁을 가로막는 규제와 제도적 장벽을 해소하고 기업은 기업가 정신을 불태워 새로운 혁신 엔진을 창조해야한다. 정부는 일관된 정책과 물가·환율안정 등을 통해 불확실성을 줄여 안정적인 투자환경을 마련하고 중국 수출시장의 위축을 감안해 개성공단 같은 특구를 늘려 북한의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는 과감한 남북경협의 새 돌파구도 시도해 볼 때다.
그러잖아도 새해는 ‘정치의 해’가 될 판이다. 4·12국회의원선거가 예정돼 있고 20대 국회는 6월 출범 직후부터 2017년에 있을 19대 대통령선거 체제로 전환이 예상된다. 두 차례 큰 선거로 시급한 민생현안이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그동안 쌓여 있던 사회갈등이 폭발할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1894년 조선조 갑오개혁 당시 유행했다는 “가보세 가보세/을미적 을미적/병신 되면 못 가리”라는 동요가 새삼 눈길을 끈다. ‘갑오년에 개혁을 해야지 을미년에 을미적대다가 병신년까지 가면 실패한다’ 는 뜻이란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갑오년에 120년 전 갑오경정을 본받아 개혁을 내걸었지만 2015년 을미년 한 해도 ‘을미적거리며’ 성과 없이 흘려보냈다. 올 한해도 허송하면 개혁은 영영 물 건너간다. 구조개혁이 ‘병신 되어 못가는’ 2016 병신년이 아닌, 혁신과 지혜가 넘쳐나는 붉은 원숭이해 로 우리 모두가 만들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