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심판원은 과세관청의 무리한 세금 부과에 대한 납세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정부 기관이다.
'행정심판전치주의(行政審判前置主義)'에 따라 조세심판원을 거쳐야만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세청(심사청구) 또는 감사원(심사청구)을 통한 구제의 길도 있지만 대부분의 조세불복 사건(국세+지방세)은 심판원으로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심판원의 역할이 중요하며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심판원의 '문턱'을 넘는 납세자들이 조세심판원에 대한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판원의 존립 이유는 납세자권리구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철저한 중립성과 세법원칙에 근거를 둔 심판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시장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는 심판원에 대한 평가는 무언가 불길하다.
일반적으로 과세관청이 세금부과 과정에서 세법 해석상 모호한 대목이 상당할 경우 국고에 유리한 방향의 부과처분을 내리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과세관청 입장에서는 법원으로 문제를 끌고가 판단을 받기 전까지는 스스로 내린 (과세)결정이 정당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만약 부당성이 짙은 과세라면 이를 1차적으로 걸러낼 수 있는 기관이 바로 심판원이다.
하지만 심판원의 이 '여과기능'에 대한 의문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현장에서 의구심을 불러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무엇 때문일까.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여 온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해외 자회사 지급보증 수수료 과세에 대해 법원이 납세자 승소 판결을 줄줄이 내리고 있다. 몇 개의 기업이 얼마의 세금을 억울하게 부과받았는지 여부에 대한 정확한 통계치를 뽑기도 힘든 이 사건의 본질은 법원의 판결에 따라 '부실과세'로 귀결되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수 년을 끌어오다 최근 납세자 승소로 끝난 국민은행의 4000억원대 법인세 소송, 동부그룹 계열사(동부하이텍, 동부메탈)들로 대표되는 대기업들의 회계상 영업권에 대한 과세도 줄줄이 사탕으로 부실과세 낙인이 찍히고 있는 형국이다.
문제는 법원의 판결에 앞서 심판원이 이를 걸러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심판원이 이를 제대로 걸러냈다면 납세자들이 소송을 진행하면서 낭비한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과세관청 또한 소송비용(예산)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뽑아냈지만 문제의 핵심은 고액의 세금이 걸린 사건에 있어서 심판원이 과세관청과 다를 바 없는, '국고주의적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시장의 평가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심판원이 고액 사건일 수록 세수확보를 위해 국세청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판원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훼손되고 궁극적으로 '납세자권리구제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판원의 납세자권리구제 '활동지표'나 다름없는 불복청구 인용률(납세자 승소율)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해도 하락세를 거듭하다 최근 반등했다.조세심판원에 따르면 불복청구 인용률(국세·지방세 포함)은 2012년 27.8%에서 2013년 25.1%, 2014년 22.2%로 하락 추이를 보였다.
이후 지난해 불복청구 인용률은 24.1%를 기록, 직전연도인 2014년에 비해 1.9%p 상승했다. 인용결정을 받지 못한 경우 과세관청에서 부과한 세금이 억울해도 납세자의 세법해석 착오로 치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심판원에서 기각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소송 과정에서 결과가 뒤집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조세일보가 새누리당 박명제 의원실에 요청한 자료에 따르면 국세청을 상대로 제기된 조세소송 건수는 2012년 1779건에서 2013년 1881건, 2014년 1957건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조세소송 건수가 늘어남에 따라 소송가액도 2012년 2조9800억원에서 2013년 2조7600억원, 2014년 5조5676억원으로 동반 상승하고 있다.
전체 소송에 대한 국세청의 패소율은 2011년 9.8%에서 2012년 11.7%, 2013년 13.5%로 매해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2014년 13.4%로 소폭 하락했다.
그러나 소송가액 50억원 초과 조세소송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국세청의 패소율이 높게 형성되고 있다.
지난해 국회예산정책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소송가액 50억원 이상 소송 중 확정판결이 난 건수는 2010년 38건, 패소건수는 13건으로 패소율은 34.2%였으며, 2011년에는 52건 중 19건이 패소, 패소율은 36.5%를 기록했다. 이후 패소율은 2012년 30.8%에서 2013년에는 무려 45.6%까지 치솟기도 했다.
2014년 27.3%로 패소율이 낮아졌지만, 소송가액 50억원 이상 고액 사건의 패소율은 전체 조세소송 국가 패소율의 2배가 넘는다.
시장에서 '심판청구 제도의 우선순위가 납세자 권리구제가 아닌 국가 세수확보에 맞춰져 운용되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무시무시한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 "심판원에 대한 시장평가, 냉철하게 봐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심판원을 둘러싼 이런 저런 박한 평가들이 파생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심판원장 및 상임심판관 인선과정에서 불거진 '전문성' 논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전문성이 부족하면 결국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심판경험이 일천한 지휘관들이 전체적인 국가의 상황(국고)을 고려하는 공무원의 습성을 발휘(?) 국고주의적 결정을 내리도록 몰아갈 가능성이 높지 않겠냐는 것이다.
또한 법원에서 납세자 승소 결정이 내려진 사안과 유사한 사건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결정방향을 바꾸는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소극적이라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태가 계속될 경우 납세자권리구제 기관으로서 심판원의 권위가 무색해지고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독립성과 투명성에 큰 훼손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조세전문가는 "행정심판기관으로서 심판원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장의 평가가 나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라며 "심판원이 세수확보를 고려해 인용률을 고의적으로 조절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는 기관의 존립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는 "심판원이 기각한 사건이 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힐 경우 해당 사건 심판에 관여한 인사들에 대한 패널티 부여 등 강도높은 자정장치를 둘 필요가 있다"라며 "납세자들은 애를 태우게 만들면서 정작 정부 기관은 '온정주의'로 일관한다면 이는 기관에 대한 납세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조세전문가는 "세무대리인들 사이에서 고액사건의 경우 어차피 기각될테니, 심판원이 핸들링하는 시간을 줄이고 법원으로 들고 가는 것이 비용을 줄이는 방편'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는 사실을 심판원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심판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시장이 체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촌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