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따라 걷는 화북~삼양…작은 포구 '그림'에 반하고 선사 유적 '얘기'에 취하다

해마다 봄이면 제주는 섬 전체가 감귤 꽃향기로 가득하다. 그 향기를 맡아본 사람은 제주를 못 잊고 다시 찾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감미롭고 달콤하면서 은은한 중독성을 지녔다.

 
에메랄드 빛 바다가 싱그런 미역 냄새를 풍기고, 미지의 세계를 품고 있는 곶자왈은 초록물을 내뿜고 있으며, 들판에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수줍게 피어나는 곳. 돌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해 달콤한 연인의 목소리와 같고 걷다가 바라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제주. 아름다운 제주 여행을 다시 시작하자.

관악(管樂)의 섬 제주

제주에서 관악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한국전쟁 중 길버트라는 미군 소령이 자신이 갖고 있던 악기의 연주법을 그 당시 한국보육원의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오현고등학교에 오현음악당을 설립한 것이 계기가 됐다.

지금도 해마다 8월이면 제주 곳곳에서 제주국제관악제가 열리고 제주국제관악콩쿠르가 개최된다. 과거 오현단 아래에 자리했던 오현고등학교는 현재 화북으로 자리를 옮겨 관악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 오현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왼쪽 길로 들어서면 화북천을 따라 걸을 수 있다. 화북천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700년이 넘게 이어오다 4.3때 군인들에 의해 폐허가 된 마을 곤을동 터가 나온다.

화북천 왼쪽으로 별도봉이 보이는 방향에 집터만 그대로 남아있는 곤을동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뜻의 고늘개로 불렸다가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물이 귀했던 제주도는 물이 있는 곳에 설촌을 했다. 곤을동에는 용천수가 있어 일찍이 설촌 되었으며 밭농사와 어업을 함께 해온 반농반어 마을로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온 마을이었으나 군인들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마을 전체가 불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마을 터 앞에 세워진 비문에는 그날의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글로 새겨져 있어 가슴 아픈 과거를 되돌아 보게 한다. 아픈 과거를 감추려는 듯 멀리 별도봉과 바다는 말없이 푸르기만 하다.

곤을동에는 해안선을 따라 삼양까지 이르러 탐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환해장성이 남아있다. 고려 때 삼별초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벽으로 현재는 14곳 정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녀 애랑과 배비장의 사랑

바닷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화북항이 나온다. 이 길에는 제주의 기녀 애랑과 배비장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후기 소설에 나오는 배비장은 목사를 보필하는 비장의 신분으로 화북항에 들어오던 중 제주를 떠나던 정 비장과 기생 애랑의 이별하는 모습을 본다. 자신은 절대 여인에게 한눈을 팔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도 결국 애랑의 유혹에 넘어가 알몸으로 궤 속에 들어가는 망신을 당하면서도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배가 떠나고 들어오는 항구에는 이렇듯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 많다.

화북항 안쪽 마을로 걸어가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 빨래터가 있다. 제주도민들은 이곳에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고 식수로도 사용해왔다. 타도처럼 냇가에서 빨래하던 이야기는 제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건천으로 냇가는 비가 오지 않으면 말라있기 때문이다.

화북진이 둘러싸고 있는 화북항은 마을 안쪽 포구로 금돈지라 불렸으며 새로 만들어진 포구라하여 엉물머릿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작은 포구지만 조선시대에 별도포구라 불려졌으며 금돈지라는 말은 둔지로 군대가 있었다는 제주어로 그 당시 제주도에서 두 번째 큰 포구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제주도로 도망 온 죄수를 잡으러 추쇄경차관의 벼슬로 이곳에 온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고향 나주로 가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게 된다. 배에 탄 44명 모두 죽지 않고 14일간 표류하다 겨우 중국 지장성에 닿아 135일간 중국에서 만만치 않은 생활을 하고 돌아와 기록을 남긴 불후의 명작 '표해록' 출발 지점이 바로 별도포구다.

여름이면 낚시배가 이곳 화북항으로 다 모여든다. 물론 고기가 잘 잡히기 때문이지만 제주공항과 가까운 곳이어서 낚시를 하는 관광객들도 많다. 잠시 시간이 있으면 낚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자리돔 낚시를 즐겨 봐도 좋을 것이다.

2시간 정도 배에서 선장이 직접 낚시를 하고 바로 회를 떠서 먹을 수 있게 해주니 그 맛은 먹어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마을 안쪽을 걸어 보면 제주의 옛 올레와 초가지붕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들도 보인다. 돌담길도 아주 오래된 모습이다. 바다와 마을이 만나는 곳에 돌담이 있는 해신사라는 곳이 있다. 바다에서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던 곳이다.

해신사 앞 높은 돌담이 바로 화북진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높은 담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제주항과 가까워 많은 관리들이 드나들던 곳으로 그들의 애환이 속속들이 남아있다. 

동마을 복지회관을 지나 포구길로 걸어가면 별도연대를 만날 수 있다. 제주도는 이렇게 바다와 바다 끝에 있는 오름의 봉우리에 연대를 만들어 외부 침입이나 위험을 알려 왔다. 그렇다 보니 연대가 있는 곳은 대부분 바다 바깥으로 나와 있어 다른 포구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밭담

다시 길을 떠나 보자

마을 밖으로 걸어가다 보면 구불구불한 밭들이 보인다. 밭에도 돌담이 쌓아져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밭담은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만의 아름다움이다.

밭길을 따라 걷다보면 벌랑마을 안에 아주 작은 포구가 있다. 포구를 따라 들어가면 바닷가에 붙은 집들이 옹기종기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여름 철 해질녘이면 노인들이 모여앉아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세월을 맞바꾸고 있다.

이 길에서 이렇게 또 다른 길을 만나게 된다. 멀리 환해장성이 해안선을 따라 삼양까지 길게 늘어서 있다. 저 길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을 것이고 혹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환해장성을 따라 걷다 보면 눈앞에 나타나는 별랑포구는 작지만 아름다운 곳이다. 별랑포구를 지나 삼양동 검은 모래 해변을 향해 걸어가다 봄이면 멸치가 많이 들어와 은빛의 멸치를 말리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운 좋게 주인을 만나 멸치 몇 마리 얻어먹으면 시원한 맥주한 잔이 절로 생각난다.

선사 시대 유적이 있는 삼양동

삼양동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의 원주민이 어디서 온 것이냐에 대한 정확한 답이 아직 나오지 않고 구멍설화를 통해 삼성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곳 삼양에서 발견된 유적은 선사시대 것이다. 움막으로 집을 짓고 함게 공동체 생활을 해왔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지금의 아이누족의 생활 모습과 비슷해 제주도의 원주민이 아이누 족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두게 했다.

최남선은 제주족은 체모, 수염, 성격이 아이누 족과 닮은 데가 많고, 특히 언어와 땅이름에서도 비슷한 발음이 많은 것을 들어 제주에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아이누 계통이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정설은 아니다.

고려목종(1002년) 때에 화산이 폭발하여 지금의 제주도가 만들어졌고 그 당시 제주 전역에 풀과 나무가 살아남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을 것이라는 설이다.

삼양에 있는 민속촌과 선사유적지를 돌아보며 옛길을 마음에 담고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삼양의 검은 모래해변은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제주시와 가까워 여름이면 밤에도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해변을 따라 해안길안으로 계속 걸어가면 용천수가 나오는 작은 포구도 나오고 잠시 쉬어가라고 포구 옆에 정자도 있다. 올레길 18코스를 걷는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서 조천 만세동산까지 걷는 것이 보통이다.

멀리 원당봉이 눈 앞에 보이면 오름 기슭에 자리한 불탑사도 들러 보자. 조선 여인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가 아들을 낳기 위해 세웠다는 5층 석탑이 있는 불탑사는 작지만 고요하게 느껴진다.
이 불탑사는의 원찰은 원의 3대 사찰 중 하나인 원당사였다. 기황후가 3당 7첩의 좋은 기운의 산세에 이 절을 짓고 석탑을 쌓아 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만 남아있고 지금의 사찰은 재건한 것이다. 다행히 석탑이 복원되어 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것이다. 
 
원당봉은 꼭대기에 당이 있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3개의 능선에 7개의 봉우리가 있는 아름다운 오름이다. 멀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제주도 유일한 화력 발전소가 아래 보인다.
오름 정상은 17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산책 코스로 아주 훌륭한 곳이다. 이번 여정은 이 길을 내려가면서 마무리하자.

어둠이 내려앉는 바다의 풍광은 어디든 아름답다.

한치물회가 유명한 해찬식당

화북항 바로 앞에 위치한 해찬식당은 바다에서 바로 잡은 자연산 회만 팔기로 유명한 집이다. 여름이면 한치물회를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경화 칼럼니스트(제주시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