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뱃고동 소리 벗삼아 걷는 곽지~한림…해변의 길손, 추억의 발자욱 남기다

여행은 그렇다.

일상이 힘들거나 지칠 때 몰래 꺼내 먹는 추억의 비타민이다.

약효가 떨어질 때 우리는 다시 여행을 꿈꾼다.

그러나 제주도에서의 자동차 여행은 자칫 의미없는 관광이 되기 싶다.

누구에게나 익숙해진 사이버 음성의 길 찾기 도우미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정확히 데려다 주는 역할을 하지만 길옆에 핀 들꽃의 이름은 알려 주지 않는다.

또 아름다운 비경은 차로 갈 수 없는 길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곽지에서 한림항까지 가는 해안길이 그렇다.

곽지 해수욕장은 최근 외국인 여행자들이 많이 찾아와 마치 이국의 해변을 연상케 한다.

한 낮의 기온이 35도를 웃도는 폭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다를 찾는 이들을 반기는 곳.

철 되면 해변으로 밀려오는 멸치 떼가 모래사장을 은빛으로 물들인다.

곽지해수욕장 동쪽 끝 넓은 해안은 장사포구라 불리는 곳으로 옛 선조들이 멸치잡이를 했던 곳이다.

수영을 즐기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곽지해수욕장을 찾는 이유는 바로 얼음 같이 차가운 물이 솟아나는 용천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마을은 한라산 아래 사냥을 주로하며 살던 산촌 마을과 목축과 농사를 겸하며 살던 중산간 마을 그리고 어업을 하며 살던 해안 마을로 크게 나뉜다.

특히 해안 마을은 먹는 샘물이 솟아나는 곳에 자연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곽지의 용천수는 한라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해 땅속으로 스며들어 곽오름을 돌아 바다에 이르러 솟아나는 달콤한 물이라 해서 제주어로 돈물, 과물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돌담을 쌓아서 먹는 물, 씻는 물, 빨래하는 물로 나뉘어 사용해왔다.

곽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기도 하다.

종이었던 남편이 바다에 빠져 죽자 3년간 제를 지내며 슬퍼하고 60세가 되도록 수절하며 살았던 아름다운 여인 김천덕 효부의 이야기다.

수많은 남자들이 탐하려 해도 죽기를 각오하고 절개를 지킨 종의 아내의 뜻을 기려 비를 세웠고 훗날 이곳을 찾은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 임제가 천덕전을 지었다.
 
또, 곽오름과 곽지해안길을 돌아 금성리 마을까지 이어지는 11킬로미터의 곽금8경은 초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이 발견한 아름다운 올레길이다. 곽지과물과 해변 그리고 한담공원에서 곽지 해변까지의 해안길이 포함된 길이다.

아이들의 눈에 아름답게 비친 비경을 함께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을은 해안을 돌아 반달처럼 자리하고 있다. 

겨울에도 이곳 해변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타지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사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크고 작은 카페와 음식점, 게스트하우스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곽오름을 내려와 금성 뒷동산을 돌아 금성리 마을로 들어오면 귀덕리와 경계인 정자천이 나온다.  다리를 건너 다시 귀덕1리 거북등대가 보이는 마을 해안길을 걷다보면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마을 사람들이 바다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귀덕 괘물동산을 지나 해안도로로 접어들면 해녀학교가 있다.

포구 끝에 새로 지어진 해녀학교 건물에서는 해녀들이 갓 잡아 올린 해산물을 직접 맛 볼 수 있다.

학교에서는 해녀들의 물질 수업이 있다.

제주로 이주해 해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나 해녀처럼 바다 깊이 해산물을 따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곳 한수풀 앞 바다에서 교육을 받는다.

물때가 맞으면 신참 해녀들이 숨을 참고 힘찬 발질을 하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수원리에 접어들면 멀리 바다에 작은 섬이 눈에 다가오기 시작한다.

비양도다.

한림까지 비양도를 향해 한발씩 가까이 걸어가는 느낌의 해안도로는 지칠 때 즈음 바다를 보고 쉬어가라고 작은 정자와 의자가 여행자를 기다린다.

넓은 들판 가운데 소나무 몇 그루가 작은 쉼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렇게 바다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바다가 두렵다고 한다.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바다에 의지해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당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기기 마련이다.

제주는 바다 마을에 당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1만 8천이나 되는 많은 신들의 존재는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수원리는 대수포구와 평수포구가 있다.  수원리는 풍부한 어족으로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갈매기도 많이 찾는 곳이다.

또 대수포구 끝 방파제는 비양도에 걸쳐 내려가는 저녁노을이 일품이다.

노을이 바다에 잠길 때면 바로 옆 한림항의 뱃고동 소리가 요란하다. 

일반인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항구의 많은 배들은 깃발을 휘날리며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한다.

한림 항구 안쪽에는 매일 열리는 매일 시장과 일주도로 가까이 오일마다 열리는 오일장이 있다.  

매일 시장에는 순댓국과 머리고기와 같이 뱃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들과 매일 들어오는 싱싱한 생선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항구에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 다시 배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면 그물에 걸린 고기를  항구에 내려놓고 수 십 명의 어른들이 서서 빠른 손놀림으로 고기를 골라낸다.

어부들은 새벽부터 시작되는 경매가 끝나고 아침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나면 하루 일이 끝난다고 한다.

제주도는 부두 가까이 고기국물을 우려 내 만든 해장국 집이 많다. 그래서인지 어디서든 아침부터 해장국에 막걸리 한잔씩 나누어 마시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한림에도 줄을 서서 먹는 유명한 해장국집이 있다. 

간혹 사람들이 물어본다. 몇 번을 가보면 제주도를 제대로 알 수 있냐고?

아무도 모른다.

그저 알고 있는 만큼 보여주고 보는 만큼만 알려주는 끝없이 비밀스런 보물을 숨겨둔 화수분 같은 제주도니까.  

제주에 5년을 살면서 아직 368개 오름도 다 오르지 못했다. 

최근 오름 동호회를 만들어 토요일마다 오름 한 개씩을 오르기로 했다. 

한 번도 거르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앞으로 7년 뒤 오름 탐방이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설레는 마음으로 7년은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물을 찾아 떠나는 기분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