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대북전략 기조는 대화와 압박의 병행전략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이 잇따르면서 '제재․압박 일변도'로 돌변했다. 지금은 북한과 대화를 얘기할 때가 아니라며 '최고압박'을 주문했다. “도발해 올 경우 조기에 분쇄하고 재기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초강경 메시지도 날렸다.
전격적인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발사대 추가배치로 핵심 지지층의 격한 반발도 사고 있다. “현 상황에서 우리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라고 해명하면서도 '임시배치'라는 꼬리표는 떼지 않고 있다. 대화와 동맹공조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외교안보정책의 중심이 흔들리는 모습이다. '한반도 운전자'론에 빗대어 '대북접근의 우회전'이란 말도 나온다.
제재일변도의 대북정책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과 관련, 문대통령의 최측근 김경수(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얼마 전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행보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분석해 놓았다”며 일독을 권한 글이 눈길을 끌었다.
한 시사주간지 기자가 올린 글은 “문대통령이 지금 굴욕을 감내하면서 사실상의 핵보유 국가인 북한과 맞서 함부로 취급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 생명줄을 쥐고 있는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기고 있다. 기는 것 뿐 아니라 미국이 짖으라고 하는 대로 짖어 주고 있는 것”이라고 썼다.
표현이 원색적인데다 내용 또한 충격적이다. 문 대통령이 초강력 제재에 앞장 선 것은 자의가 아니고 동맹국 미국의 압력에 부대껴 '가랑이 밑을 기고 있는 것'이며, 푸틴에게 대북 원유공급중단 협조요청을 한 것도 '짖으라고 하는 대로 짖어준 것'이라는 함의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월 국무회의에서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의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미국의 유력 상원의원은 트럼프의 발언이라며 “전쟁을 해도 저쪽(한반도)에서 하고 수천 명이 사망해도 저쪽(한반도)에서 죽지 여기(미 본토)서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옮겨 우리의 자괴감과 분노를 자극했다.
북핵 해법을 놓고 한미동맹간 불협화음은 사드배치문제로 노골화됐다. 대선국면에서 문 대통령은 사드를 다음 정권에 넘겨 외교적 협상카드로 써야 한다고 고집했다. 동맹간 합의여서 없던 일로 할 순 없겠지만,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지 않게 중국이 통제해준다면 환경영향평가를 내세워 '시진핑(習近平) 2기'가 출범하는 10월 공산당대회까지 추가배치를 미루면서 해법을 찾아보자는 전략이었다. 김정은의 폭주가 시작되면서 이 모두가 물거품이 됐다.
미국은 우리 측의 '절차적 정당성'을 내심 못마땅해 하며 우리정부를 전방위적으로 몰아 붙였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 이튿날 밤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먼저 꺼낸 말도 “사드 배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는 다그침이었고 이에 문 대통령은 “임시배치를 최대한 신속하게 완료할 것”이라고 입막음 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대통령은 전화통화 때 “그래, 북한과 대화는 해봤느냐”며 문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 급기야 “내가 말해왔듯이, 한국은 그들이 말하는 대북 유화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있다. 그들은 오직 하나만 알고 있다”는 트위터를 날려 조롱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 아베총리와의 통화에서 트럼프는 한국에 대해 “대북대화를 구걸하는 거지같다”고 비난했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일본 외무성은 “그런 사실이 없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이를 보도한 후지TV는 심야뉴스에서도 같은 보도를 그대로 내보냈다.
게다가 미일 정상의 잇단 통화는 군사적 압박에 엉거주춤해하는 한국과 그에 짜증을 내는 미국 사이를 일본이 중재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까지 곁들였다.
문대통령은 지금 사면초가다. 한반도 관련 모든 당사국과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비우호적이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문대통령의 통화요청마저 계속 외면하고 있고, 러시아 푸틴대통령은 문대통령의 원유공급중단 협조요청을 거절하며 “북한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풀을 먹으면서도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되레 '훈계'조였다.
미국은 동맹이면서도 함께 가지 않으려는 한국에 여전 화가 난 상태다.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대행은 하원청문회에서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유화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면서도 “우리는 한국이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열심히 노력해오고 있다”는 뼈있는 말을 던졌다. 우리정부가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인도지원계획을 발표한 데 대한 미국 정부입장을 묻는 기자 질문에 국무부대변인은 “한국에 물어보라”고 답변을 피했다.
북한의 6차 핵실험 9일 만에 유엔안보리가 만장일치로 초고속제재를 결의했지만 원유공급차단과 김정은 제재 등 핵심사항은 빠져 '중국의 벽'을 넘지 못했다. 유류제재의 길을 텄다고는 하지만 새 제재결의 사흘 만에 다시 태평양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미루어 제재-도발-추가제재의 악순환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제재를 견디지 못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높지 않고, 외교적 해법이 비핵화가 아닌 '동결'로 마무리될 경우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하는 상황도 배제하지 못한다.
대응 수단으로 한반도비핵화선언을 폐기하고 전술핵 도입이나 자체 핵무장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전술핵재배치는 이를 가진 미국이 동의해야한다.
불과 1~2시간 만에 날아올 수 있는 미군의 '핵우산' 전력이 즐비한데 굳이 전술핵을 재배치해 동북아시아의 핵개발과 군비경쟁을 미국이 자극할 이유가 없다. 세계를 관리해야하는 미국입장에서 잃는 것이 더 많고, 우발적, 돌발적 충돌이 상존하는 한반도가 자칫 핵 전쟁터로 비화할 위험도 커진다.
문재인 대통령도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고, 미 국방장관도 “핵무기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핵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실제 사용하게 되면 그 순간 북한정권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점을 김정은 정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미국의 핵우산을 믿고 국제사회와 압박에 동참하면서 미국이 북한과 대화로 해법을 찾도록 돕고 6자회담과 남북대화 재개를 위한 여건조성에 적극 나서는 일이 현재로선 최선이다.
전쟁을 막고 국가와 국민안전을 지키는 길이라면 '가랑이 밑'도 기어야한다.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수용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응하면서 미국을 6자회담에 끌어들여 9·19 성명을 이끌어내고, 북미 협상 추진에 이어 10·4 남북정상회담도 만들어냈다.
문 대통령이 제제와 압박을 우선하면서 한미간 불협화음은 표면상 봉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문 대통령과, 대화보다는 군사행동을 위한 명분 쌓기에 치중하는 트럼프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을 두 대통령이 어떻게 슬기롭게 관리하고 메우느냐에 따라 한반도 운명과 한미동맹의 장래가 달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