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1천만원이고 'A+'는 1억원, 'B+E'는 2억5천만원, 'H+E-'는 8억500만원 등 모든 빌려준 돈의 크기를 암호화하고, 200여명의 직원은 상급자 1명만 알 수 있을 뿐 서로 조직원임을 알 수 없도록 하는 점조직.
돈의 크기뿐만 아니라 ▲M은 만남 ▲E는 이자율 ▲DG는 대출기간 ▲SA는 대출액 ▲G는 급료연체유무 등 업무에 필요한 용어와 행위까지 암호화. 더 나아가 서울 일대에 10여개의 빌딩사무실을 임차한 뒤 수시로 영업장소 옮기기.
악덕사채업자 L某씨가 세무조사에 대비해 '007 뺨치는 작전'을 구사하며, 지난 1990년부터 은밀하게 운영한 사채조직의 전모다. 그러나 이처럼 철저한 L씨의 조직도 결국 '물' 때문에 국세청에 덜미가 잡혔다.
국세청은 11일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바지사장(무재산 위장명의자) 13명을 내세워 1조87억원의 사채자금을 굴려, 지난 5년간 1058억원의 소득을 탈루한 사채업자 L씨를 적발했다"며 L씨의 사례 전모를 공개했다.
L씨가 국세청에 적발된 계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진행됐다. 당초 국세청의 세무조사대상은 L씨가 아닌 L씨의 바지사장 H씨.
국세청은 H씨의 보유재산에 비춰 사채규모가 큰 것에서 실제사업자가 따로 있을 것을 의심했고, 세무조사를 확대했지만 실제사업자 L씨의 꼬리는 좀체 잡히지 않았다. 간접적으로 확보한 증빙서류 확인에서도 조사가 한계에 봉착된 것.
이 때 국세청이 확인한 것이 '물 값'. 국세청은 증빙서류 검토과정에서 1개 사업장의 물값 치고는 많은 9만원에 이르는 것을 확인하고 의혹을 갖기 시작했다.
급기야 생수판매회사를 통해 알아 낸 내용은 물값 9만원은 11개 정수기에서 쓴 물값의 합계라는 것.
이에 따라 국세청은 생수회사를 통해 생수가 배달되는 11개 장소를 확인, 결국 이 장소가 모두 금융대부업과 관련된 비밀사업장임을 알아내고 L씨를 적발하게 됐다.
국세청 한상률 조사국장은 "L씨가 모든 자료를 암호로 처리, 전문가들을 동원해서야 암호를 풀게됐다"며 "조사과정에서 직원들이 장부를 입안에 삼키거나 찢고, 서류를 들고 도주하는 등 조사가 어려워 경찰관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다"며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한 국장은 "L씨가 비밀리에 벌어들인 1058억원의 탈루소득은 소득세와 가산금 추징, 대부업법 위반에 따른 벌금 등을 합치면 남는 돈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