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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인생역정]②

인권변호사의 길로 가도록 힘을 준 건 노무현과 셋째 형

조세일보 | 조문정 기자 2021.10.1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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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 끝에 사법시험 최종합격… "십시일반 쌈짓돈을 모아주신 아버지, 셋째 형님께 감사"

소년공 시절 부조리, 인권변호사의 길로… "군부독재 시절, 고생길 자초… 헌신한 가족 눈에 밟혀"

인권변호사의 길로 가도록 힘을 준 건 노무현과 셋째 형… 故 이재선 "너의 뜻대로 살아가라"

성남시립병원 설립운동 시작… "정치인 이재명의 출발지"이자 "정치를 결심한 이유"

'깡' 이재명에게도 선거는 쉽지 않았다… 2006년, 2008년 내리 낙선하다 2010년 성남시장 당선

◆삼수 끝에 사법시험 최종합격… "십시일반 쌈짓돈을 모아주신 아버지, 셋째 형님께 감사"
1983년 2학년이 되자 구례 화엄사 금정암에서 본격적으로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가족의 희망이자 대들보였다. 그는 1985년 10월 8일 일기에 "집안 모든 식구들의 기대와 고생에 비추어 일분일초를 다투어 소중히 알고 공부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라며 가족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절절히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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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복을 교복처럼 날마다 입고 다녔던 이재명.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사법고시 2차 시험에서 문제를 착오해 낙방하자 큰 충격을 받고 방황했지만, 가족들의 사랑 덕분에 일어설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혼자 힘으로 무엇이든 돌파해내리라 믿었던, 그리고 그 믿음이 부서져 좌절했던 나를 추스른 건 다름 아닌 가족과 친구들의 위로였다. 나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사법고시 재도전을 결심한 날인 1985년 10월 18일 그는 "지금부터는 일기장의 성격을 좀 바꾸어서 나 자신의 결심과 행위에 대한 단순한 기록과 평가를 지나서 좀 더 넓게 가족과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도 약간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겠다. 나는 세계의 일부이며 세계는 나의 일부임을 명심하고 살 것이다"라는 다짐을 밝혔다.

신세한탄으로 가득했던 일기는 그날을 기점으로 엄숙해졌다. 그는 10월 30일 일기에 "어제는 학교 수업하고 국제법은 결강하면서 '님(임)을 위한 행진'에 참가했다. 매운 개스(가스)가 나르는 최루탄 파편이 약간은 무섭고 또한 4학년이나 되어 참가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님을 위한 길이어서 하나의 망설임도 없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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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 합격자 명단 속 이재명. 명단 왼쪽 첫째 열 1261번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1986년 10월 23일 삼수 끝에 마침내 제28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암이 재발해 사경을 헤매다 사법고시 합격 한 달 후인 11월 24일 결국 가족의 곁을 떠났다.

가난한 환경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던 그를 나무랐던 아버지가 밉기도 했지만, 대입 입시와 사법시험 공부를 물심양면 지원해 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그는 "대입 학력고사를 넉 달 앞둔 때 공장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매달렸던 내게 학원비와 교통비를 대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사법고시 2차 시험에 낙방해 큰 좌절에 빠져 있을 때 고향에 가서 친구와 놀다 오라고 격려해주신 분도 아버지였다. 아버지 말씀대로 안동에 다녀온 덕에 나는 좌절감을 씻어내고 시험에 재도전할 용기를 얻었다. 가족들은 2차 시험에 재도전하라며 십시일반 쌈짓돈을 모아서 내게 쥐여줬다. 대학을 졸업해 생활비 명목의 장학금도 받을 수 없게 된 즈음이었다. 그 쌈짓돈이 없었다면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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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대학교 졸업식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그는 자필수기에서 "4학년 때 장학금조차 끊어진 상태에서 끝날 시기를 알 수 없는 고시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 아버지는 고된 청소부 일을 하시면서 사용하다 버린 생리대가 뒤섞인 쓰레기더미에서 주워 모은 종이와 고철 등 잡동사니를 팔아 비밀이 모아둔 돈을 털어 고시원 하숙비를 내주셨고, 그나마 많은 장학금을 받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셋째 형님에게도 나를 도와주도록 어려운 부탁을 하셨다"고 회상했다.
 
◆소년공 시절 부조리,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다… "군부독재 시절, 고생길 자초… 헌신한 가족 눈에 밟혀"
그는 사법고시에 최종합격한 후 1986년 11월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성남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억울한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는 포부와 함께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꼭 돌아온다"는 신조를 밝혔다. 소년공 시절 겪었던 수많은 부조리가 인권변호사의 길로 그를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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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1월 4일 자 경인일보 인터뷰.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물론 현실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차라리 성적이라도 안 좋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판검사 임용권 안에 드는 성적을 받아 들었다. 날 위해 헌신한 가족들의 경제적 문제도 자꾸 눈에 밟혔다.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에 인권변호사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꽃길을 저버리고 고생길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까닭이다"라고 밝혔다.

1987년 4월 28일 일기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는 인간적인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이 돼야지 명사나 권력자가 돼서는 안 된다. 부끄럽지 않은 나의 행태에 대해서 결코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나아가 그로 인하여 내 행동에 제약을 느껴서는 더욱 안 된다"고 적었다.

그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경제적 이익과 안정적인 미래,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위해 판검사가 되는 길도 상상해봤지만,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로 느껴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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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24일 이재명의 일기.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1988년 4월 24일 일기에서 그는 "현직에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정된 나의 인생설계에 어떤 방식으로 조응할 수 있는가. 모두 소극적으로 사건이 배당된 다음에야 그 일을 할 수 있고 막상 일이 내게 생긴다 하여도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인권변호사의 길로 가도록 힘을 준 건 노무현과 셋째 형… 故 이재선 "너의 뜻대로 살아가라"
사법연수생 시절 몸담았던 '노동법연구회'라는 학회에서 1988년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강연에 깊이 매료된다. 그는 "변호사는 굶어 죽지 않는다"는 노무현의 말을 믿고 판검사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뜻을 지지해줬던 사람은 다름 아닌 셋째 형 고(故) 이재선 씨였다. '너의 뜻대로 살아가라'는 형 이재선 씨의 격려에 그는 형편에 대한 갈등과 번뇌를 접고 인권변호사라는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자신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형 이재선 씨와 소위 '형수욕설'로 알려진 갈등을 빚게 될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이 후보는 지난 9월 26일 집사부일체에 출연해 그와의 갈등에 대해 해명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그는 "형님은 제가 간첩이라고 믿고 있었다"며 "소문 중 제가 북한 공작군에게 1만달러를 받았다는 말은 형님이 한 말"이라고 했다. 이어 "형님은 시정에 관여했고 제가 차단했다"며 "그 일을 어머니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다가 (형이) 어머니를 협박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해서 어머니가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런 상황에서 다툼이 벌어진 것"이라며 "어쨌든 전 당시 시장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화해를 해야 한다. 형님은 이미 영원히 가셔 버렸다. 지우고 싶은데 지울 수 없는 게 삶이고 책임이다. 공직자로서 품위를 유지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가족 간에 잔인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8주년이 되던 지난 1988년 5월 사회로 뛰어들었다. 그는 5월 19일 일기에 "신록의 계절 5월, 동시에 피맺힌 5.18의 5월이다. 8년 전의 그 거대한 민주화를 지향한 민중의 함성이 군사독재정권의 무자비한 총칼 몽둥이의 탄압에 의해 무참히 박살되던 그런 달이다. 이러한 달에 그리고 오늘의 상황에서 나를 한 번 돌이켜본다"고 했다. 또 "나는 성남을 새로이 일으킬 것이며 민주화의 기점으로 성장시킬 것이고 나는 성남지역의 사랑받는 변호사가 될 것이다", 1989년 1월 4일 일기에는 "나의 지식과 능력, 지위가 성남의 지역운동, 그중에서도 노동운동의 발전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적었다.

그는 훗날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 "약자를 돕는 성남의 인권변호사가 됐다. 부정부패와 비리를 처단하는 시민운동가도 됐다. 세월이 흘러 성남을 일으키겠다는 30년 전의 다짐도 이뤘다"고 자평했다.
 
◆성남시립병원 설립운동 시작… "정치인 이재명의 출발지"이자 "정치를 결심한 이유"
1989년 3월 연수원 동기와 성남시청 앞에 변호사사무소를 열었다가 1989년 말쯤 법원 앞에 단독 사무실을 개업하고 본격적인 노동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자정이 넘은 시간에 3공단의 공장담을 넘었고 수십 명에 이르는 구속시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무료로 변론활동을 하곤 했다. 1991년쯤엔 이천상담소를 개소해 매주 월요일마다 이천에서 노동상담을 했고, 광주노동상담소의 개설과 운영에도 참여했다. 그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분신노동자의 시신을 지키며 병원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밤을 새웠다", "사무실이 의뢰인이 아닌 노동자들로 북적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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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 용도변경 중단을 촉구하는 시민운동가 이재명.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팬텀북스)]
1995년 성남시민모임(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을 제기하고,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을 파헤쳤다. 성남 시가지의 종합병원 두 곳이 폐업하자, 2004년 '성남시립병원설립추진위원회'를 설립해 주민들과 성남 시립병원 설립운동을 벌였다.

그가 성남 시립병원을 "정치인 이재명의 출발지"이자 "정치를 결심한 이유"로 꼽는 이유가 있다. 지난 9월 13일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당시 시의회는 최초의 주민발의 조례를 단 47초 만에 날치기로 부결해 버렸다", "방청하던 시민들과 함께 항의하다가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수배됐다. 제 전과 중 하나가 이렇게 생겼다"고 적었다. 회의장을 나가는 시의원들을 회의 속개를 위해 붙잡으려다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공용물건손상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현실을 바꾸자. 기득권 세력은 이익이 없는 한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관심이 없다. 저들이 하지 않으면 우리 손으로 바꾸자. 다른 이에게 요청할 것이 아니라 시장이 되어 내 손으로 바꾸자"고 결심했다. 이재명의 정치입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시절 그의 음주운전, 2002년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은 검사사칭 사건, 특수공무집행방해죄 등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깡' 이재명에게도 선거는 쉽지 않았다… 2006년, 2008년 내리 낙선하다 2010년 성남시장 당선
굽은 팔로도 악착같이 일했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그러나 선거는 쉽지 않았다. 2006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단수공천으로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이대협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려 했으나 경선에서 조성준 후보에 밀렸다. 성남시 분당구 갑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았지만, 한나라당 고흥길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10년 마침내 51.2%의 득표율로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됐고, 이어 2014년에는 55.1% 득표율로 새누리당 신영수 후보를 물리치고 연임에 성공해 민선 6기 성남시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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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6월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수도권 최대 접전지 중 하나로 꼽혔던 경기도 성남시 시장으로 당선된 이재명. [사진=연합뉴스]
시장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지방 정부 최초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재정난으로 판교신도시 조성사업비 5천200억원을 단기에 갚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LH·국토부 등과 공방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3년 만에 4572억원을 갚았고, 나아가 7000억원이 넘던 성남시 부채를 모두 갚았다. 성남 청년 11,300명에게 1인당 연간 100만원을 지급하는 '청년배당정책'도 실시한다. 그의 대선 공약인 '기본소득'의 모태가 바로 청년배당정책이다.

전임 이대엽 시장과 성남시 공무원들의 비리를 파헤친 데 이어,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지난 2016년 11월 4일 민족문제연구소와 부산대학교 총학생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공부하려고 야간 특수대학원에 갔는데 거기서 부정부패 극복방안을 연구했다. '어떻게 하면 이걸 잡아서 제거할 수 있나', '부정부패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려고. 저의 최고의 꿈이 그거다. 그런 짓 못 하는 정상적인 세상을 만드는 게 내 꿈"이라고 말했다.

청탁과 압박을 막기 위해 시장실에 CCTV를 달기까지 했다. 이재명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지난 9월 23일 조선일보 유튜브 겸 팟캐스트 '강인선·배성규의 모닝라이브'에 출연해 CCTV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정 의원은 "2010년쯤 친한 사이였던 이재명 성남시장을 시장실로 찾아가서 사법연수원 때 일화 등 옛날이야기 등을 스스럼없이 하는데 이 지사가 갑자기 '형, 나하고 말할 때 조심해야 해'라면서 사무실 천장을 가리켰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개발업자들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뭔가를 두고 가려고 해서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 싶어서 달아둔 것"이라고 전했다. 그가 CCTV를 달게 된 직접적 계기는 한명숙 전 총리 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훗날 누군가 접견실 의자에 봉투를 두고 나왔다고 주장한다면 CCTV 없이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남시장 시절, 특히 민선 6기 시장 시절 287개 공약 중 270개를 실행해 94.1%의 이행률을 기록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전국 기초단체장 공약이행 평가에서 성남시는 2014년, 2016년, 2017년 각각 최고 등급인 SA등급을 받았다. 그는 '성남시 3대 무상복지(청년배당·무상교복·산후조리지원)' 예산 편성과 시행을 밀어붙이느라 경기도와 대법원까지 가서 법정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2011년부터 중·고등학교 신입생 무상교복지원사업, 2013년 11월 성남시립의료원 착공, 무상 공공산후조리원 건설을 추진했으며, 노후 주택 리모델링을 지원했다.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선거 캠페인 구호는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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