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세자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국세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이른바 '권 할머니 사건'이 납세자 당사자와 국세청 사이의 대화가 단절된 가운데 끝이 보이지 않는 평행선을 긋고 있다.
사건의 주인공인 권某 할머니(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는 지난해 8월에 이어 올해도 9월 2일 같은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서도 국세청에게 세금을 돌려주라고 시정권고를 한 만큼, 국세청은 마땅히 세금환급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권씨는 또 방송에서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시정권고 이후 세무서에서 "상당부분을 환급 해줄테니 방송출연에 대한 사과를 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권씨 사건이 다시 부상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사과편지 부분이다. 실제로 세무서에서 사과편지를 요구하고 그 명분으로 환급을 해주기로 했다면 정말 세법을 뒤흔들 황당한 요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세금의 환급은 세입징수관인 세무서장에게 그 1차적 권한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세법에 근거해서 환급을 해줄 수 있을 뿐 그 외 다른 명분을 원한다는 것은 논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당사자인 권씨는 "세무서직원이 사과편지를 쓰라고 해서, 쓰면 환급하는 줄 알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담당세무서 직원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엇갈린 주장을 내놓는다.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알아봤다.
■ '사과편지 쓰면 세금 환급' 말 했나
권씨는 2일 조세일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난 3월 15일 송파세무서 직원이 '전향적으로 공사원가를 인정하겠다. 액수는 96년치 8000여만원과 97년치 1억6000∼7000여만원 정도 된다. 관련자료를 제출해 달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권씨는 "액수를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관련자료를 달라고 요청했으니 마땅히 환급을 약속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이후 3월21일 일이 얼마나 진행됐나 싶어서 세무서에 들렀더니 세무공무원이 방송내용을 언급하며 '세무서가 좀 그러니 서장에게 사과편지를 쓰라'고 요청, 사과편지를 쓰면 세금을 환급해 주는 줄 알고 편지를 쓰게 됐다는 것.
권씨의 설명에 대해 세무서측은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당시 권씨와 면담을 했다는 담당 세무공무원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아직도 그런 공무원이 있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내가 국세청장도 아니고 세무서장도 아닌데 환급을 해주겠다며 사과편지를 요구하다니 말도 안 된다"며 "단지 방송 때문에 세무서가 상당히 소란스러웠고 납세자의 입장도 딱했기 때문에 탄원서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말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환급의 대가로 사과편지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환급약속과 함께 사과편지를 요구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 권씨의 주장이지만, 세무서에서는 탄원서가 아닌 사과편지를 요구한 적은 없다는 것이어서 진실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 어떻게 된 사연인가
갈등의 핵심이 되고 있는 부분은 세금을 부과하는 시점을 계산하는 국세부과 제척기간의 종료시점에 대한 양쪽의 의견차이가 크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권씨는 건축토목회사(송파구 가락동)를 운영하다 지난 2001년 9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간의 사업연도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가공된 매입계산서 등의 혐의로 약 9억원의 세금을 추징당했다.
이에 권씨는 2001년 8월, 국세심사청구와 심판청구를 통해 구제를 받아보려 했으나 당시에는 가공된 매입계산서가 아니라는 정확한 소명자료를 제출하지 못해 각각 기각되고 추징된 금액을 모두 분할해서 완납하게 됐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2004년 3월, 권씨는 뒤늦게 가공거래 178건 중 106건에 대한 건축업자들과의 공사비 지불 기안서류, 미지급 내역서, 어음지급내역 등 소명자료를 확보해 제출, 청구대상 7억여원을 환급받기 위해 다시 재심사를 요청했다.
문제는 관할 세무서에서 이 소명자료중 1998년도 귀속분을 제외한 1996년도와 1997년도의 자료는 과세제척기간인 5년이 지났기 때문에 환급해 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힌 것.
문제의 핵심이 되고 있는 과세제척기간에 대해 권씨는 "관할 세무서가 최초 세금을 고지한 2001년 당시 거짓 자료에 의한 포탈혐의로 부과했기 때문에 과세제척기간은 부정한 세금포탈의 경우인 10년으로 봐야한다며 1996년과 1997년도 귀속분도 환급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권씨는 또한 당시 상대거래자였던 토목건설업자들이 포탈한 혐의로 권씨 본인에 과세했기 때문에 이중과세라는 주장도 펼쳤다.
그러나 국세청 관계자는 "권씨가 포탈한 것은 아니지만 포탈자인 상대거래자로부터 매입계산서를 받아 환급을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부당이득에 해당하기 때문에 추징해야 한다"며 "제척기간 5년인 일반 과세대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제척기간은 포탈거래를 한 상대거래자들과 연관지어 기간을 늘리려는 납세자의 이율배반적인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권씨의 환급요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법적으로 환급이 불가능하다는 세무서의 완강한 입장에도 권씨가 계속적인 환급 요구를 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권고사항 때문으로 풀이된다.
1996년과 1997년도 과세분에 대해 세무서가 환급을 거부하자 권씨는 청와대 등에 민원을 넣었고 이것이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이첩돼 국세청에 권고사항이 내려진 것.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세무서가 1996년 및 1997년 귀속 거래분에 대해 5년의 제척기간을 적용하는 것은 행정편의적이며 납세자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결정이라며 재조사하고 시정조치를 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국세청도 재정경제부에 질의를 통해 "당초 5년의 기간 내에 부과처분을 했다면 추후 사기 기타 부정한 행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10년의 제척기간을 적용할 수는 없다"는 유권해석을 받아냈다.
권씨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권고를 토대로 "계속된 시정권고를 내리고 있는대도 국세청이 이를 무시하고 있다"며 항의하고 있고, 국세청은 재경부의 유권해석을 통해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권고는 법적인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고 있는 셈이다.
■ 세무서는 왜 환급을 못해주고 있나
권씨는 2일 "과거 국세청에 세금을 환급해달라고 주장한 논리는 '부과제척기간'과 관련돼 있었지만, 지금은 과오납문제로 쟁점이 바뀌어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초 재정경제부 조세정책과의 관련법 담당자를 만나 상황설명을 한 결과, 그 담당자가 국세기본법 51조에 따라 환급금을 즉시처리하라는 서류를 넘겨줬다는 것.
국세청으로 이첩된 이 서류에는 '과오납여부에 대해 새롭게 사실관계를 확인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권씨는 말했다.
이 서류로 인해 송파세무서 직원은 "전향적으로 공사원가를 인정하겠다. 액수는 96년치 8000여만원과 97년치 1억6000∼7000여만원 정도 된다. 관련자료를 제출해 달라"고 말하게 됐다는 것이 권씨의 주장이다.
그러나 권씨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국세청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재경부로부터 이첩된 서류는 "이와 같은 사건이 재정경제부에 접수됐으니, 사실확인을 해보라"는 취지의 원론적인 답변이었다는 것.
국세청은 또 "과오납여부는 납세자가 스스로 신고·납부한 세금에 적용되는 용어일 뿐, 세무조사결과 추징된 세금은 과오납이 아니라 경정청구의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사건담당 직원 역시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을 했을 뿐, 인정하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 직원은 "이후 권씨 사건에 대해 세무서로서는 최대한의 관심을 갖고 전향적으로 검토, 환급할 것은 환급해주기로 방침을 정했었다"며 "검토결과 증빙불비로 돌려줄 세금은 없었다"고 전했다.
■ 소송이나 법적 해결 노력은 없는가
권씨는 방송은 물론 청와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재경부, 국세청, 세무서 등을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최근에는 국회에도 관련내용을 전달하는 등 2004년 일부 환급결정 이후 3년째 활발한 권리구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당초 우리도 국세청 차원에서 대응방향을 모색해 봤지만 법이 바뀌지 않는 한 특별한 한 명에게만 형평에 맞지 않는 법적용을 할 수는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국세청은 나아가 "세법을 집행하는 국세청으로선 법의 근거도 없이 환급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환급이 가능하려면 권씨가 부당이득반환소송을 제기해 승소를 하거나, 재경부로부터 새로운 유권해석을 받아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 전문가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국세청에 권고를 했다고는 하지만, 고충위 권고를 국세청이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라며 "상급기관인 재경부 유권해석까지 받은 사안은 특히 더 그렇다"고 말했다.
권씨의 주장대로 잘못 거둔 세금을 국세청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라면 권 할머니는 국세청에 나오지도 않을 답을 구할 것이 아니라, 국가를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더 늦기 전에 제기해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전문가는 덧붙였다.
그러나 권씨는 현재로선 거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이는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은 내지 않겠다고 말한다. 국세청에게 환급약속을 지킬 것만을 반복해서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국세청과 권씨의 줄다리기는 언제 끝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