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처분 시 주주 소외...금융당국, 대책 마련 필요

자사주 처분 악용 막기 위해선...법률상 주주 권리 보장해야 

경영권 방어 수단 도입도 검토해야

황현영 연구위원 "상법 또는 자본시장법 개정돼야"

상장기업이 자사주를 처분할 때 이사회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주주들의 권리는 외면받는 폐단이 발생해 금융당국이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세일보가 한국거래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상장법인의 자기주식 처분 규모는 처분예정금액 기준 5조8211억원으로 집계됐다.

자사주 처분은 임직원 성과 보상에 활용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주식매수선택권 행사와 교환사채 발행, 투자 및 운영자금 확보, 우리사주조합 출연, 타법인 주식취득 등 다양한 목적에 사용됐다.

처분 규모별로 살펴보면 지난해 SK하이닉스가 교환사채 발행을 위해 자사주 2조2377억원을 처분한 건이 유일하게 1조원을 넘겼다.

이어 1000억~1조원 사이는 7건(2%), 100억~1000억원은 43건(13%), 10억~100억원은 96건(30%), 1억~10억원은 109건(34%), 1억원 미만은 68건(21%)이었다.

자사주는 이사회 결의를 거치면 속전속결로 처분됐다. 결의일에 처분을 시작하거나 그다음 날 처분을 개시한 경우가 전체 건수에서 절반 넘는 비중을 차지했다.

자사주를 처분하기에 앞서 최소 일주일 전에 미리 공시한 사례는 전체의 14% 정도에 불과했다.

자사주 처분은 기업의 재무구조와 사업 전략뿐만 아니라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일인데도 주주는 소외되고 있어 개선이 요구된다.

주주들은 자사주 처분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기 어렵다. 다수의 상장기업이 이사회 결의일에 자사주를 처분하거나 그다음 날 처분하고 있다. 이사회 결의 및 공시 이후 실제 처분 개시 시점 간에 일정기간을 둬야 한다.

공시 내용도 미흡하다. 처분 목적에 대한 설명이 부실하며 인수인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인수인이 회사와 무슨 관계인지, 상호주를 형성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주주들은 이사회 결정이 주주가치를 훼손한 것이라는 판단이 서도 가처분 신청도 못 하고 무효의 소도 제기하지 못한다.

반면 자기주식 처분과 경제적으로 동일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주발행 제도는 상대적으로 주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자사주 처분과 신주발행은 인수인이 대금을 회사에 지급하면 회사는 주식(신주)을 인수인에게 교부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신주발행은 상법상 원칙적으로 주주가 가진 주식 수에 따라 신주인수권을 부여한다. 제3자 배정은 경영상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가능하도록 엄격하게 규제한다.

공시 규정도 잘 갖춰져 있다. 상장사는 자본시장법상 납입기일로부터 일주일 전까지 거래소에 공시해야 한다. 기업은 신주를 제3자에게 배정할 때 인수자가 회사 또는 최대주주와 어떤 관계인지, 선정 경위는 무엇인지, 조달한 자금은 어떻게 활용하는지 등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야 한다.

주주는 신주발행 결정으로 불이익을 받게 될 경우 상법상 신주발행유지청구권을 피보전권리로 한 가처분 신청이나 신주발행무효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자기주식에 신주발행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사주에 패키지 규제가 도입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상법 내지는 자본시장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자사주 처분과 신주발행 간의 규제차이는 어제오늘 문제가 된 게 아니라 2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논란이다. 과거 법무부는 2006년 상법 개정 시안에 자기주식 처분의 신주발행 규정 준용을 담았다가 재계의 반발로 철회했다.

기업은 효율적인 재무 활동이 어려워진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자사주 제도가 신주발행 규정을 준용하면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앞서 신주의 제3자 배정이 대법원판결에 따라 경영권 방어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경영권 분쟁 시 방어 수단은 자기주식 처분 딱 하나 남았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지적을 수용해 신주발행을 준용하되, 자사주 처분 규모가 소액이면 별도의 규제를 두지 말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만 자사주 처분이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써 만능이 아니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만호제강은 작년 6월 경영권 분쟁 속에서 우호 세력에 해당하는 우리사주에 자사주 처분 시도했는데 외부감사인 반대로 8월에 결정을 철회했다.

금융당국은 자사주 처분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경영진의 지배력 확대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법률상 주주의 권리를 보장하고 경영권 방어 수단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