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퍼펙트 데이즈(Unperfect Days)

매년 새해 첫날이면 오대산을 찾는 편이다. 월정사와 상원사 그리고 적멸보궁 등 산사와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적 유물을 만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구한 세월에도 어엿하니 그 자리를 지키고 선 수많은 수목에 매료되기도 한다. 바람 소리인지 잎새의 속삭임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계곡물소리가 더하고 산새들의 화음이 어우러질 때면 광활한 울림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뭔지 모를 연연함 마저 품게 된다. 새해 아침을 맞이하기에 괜찮은 곳이다.

이른 아침, 입을 옷을 궁리 중이었다. 먼저 일어나 음료 등 준비물을 챙기고 있는 동반자가 "오늘 월정사가 8도에서 10도네"라고 한다. "영하지?"라고 물었더니 "아니, 영상"이란다. 의아하긴 했지만 그런가 싶었다. 요즘 날씨가 워낙 따뜻했어야 말이지. 한편으로는 "강원도에 있는 산인데…." 긴가민가했다.

각자 적당한 옷차림으로 나섰다. 약간의 설렘과 소박한 희망을 품고 출발했다. 1시간이 더 지나고 백 킬로미터 넘게 왔을 때다. 옆자리에 앉은 동반자의 행동이 어수선하다. 다소 불안하다. 시선과 손놀림이 평소와는 다르다. 언뜻 눈가의 기운이 어수룩해 보인다. 무엇보다 말이 사그라들었다. 살얼음처럼.

"왜 자꾸 기온이 떨어지지?" 찬찬히 꾹꾹 누른 말투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인지 혼잣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동안 자동차 내비 화면에 나오는 외부 온도를 계속 확인하고 있었던 게다. 나서기가 애매했다. 아직 무슨 연유인지 알 길 없었으니까. 기다렸다. 차 바퀴가 몇 번이나 굴러갔을지를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핸드폰을 꺼낸다. "아, 월정사가 제주도에도 있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무슨 말이야?" "아침에 출발할 때 '날씨 앱'에서 확인한 월정사가 '오대산 월정사'가 아니라 '제주도 월정사'였네." 어이쿠, 싶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이 옷차림으로는 산에 갈 수가 없는데…. 어떡하지?" "일단 휴게소에서 외투 파는 곳이 있는지 가 보자고."

이른 시간인지라 주차장도 사람들도 한산한 편이다. 신발과 모자 파는 가게 옆에 몇몇 옷가지가 걸려있는 노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맘에 드는 색상이며 몸에 맞는 치수 고르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가격도 달라는 대로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 동반자는 "아이고,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니…."라며 기진맥진이다. 또 한 사람은 '아침에 이상하다 싶을 때 한 번만 확인해 봤어도….'라며 자책하는 소리가 입김을 타고 허공으로 사라져 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린 상원사 주차장에 다다랐다. 시동을 끄고 내리려고 하는데 주섬주섬 뭘 또 찾는 거 같다. "왜?" "어, 카드가 안 보여서" "어디 뒀는데?" "응, 이 가방에 넣었는데…." "그러면 어디 있겠지. 가방 아니면 의자 밑에 떨어졌는지 찾아봐" "이 가방을 안 열었거든." "그래? 그러면 아까 가게에서 결제할 때 사용한 카드는 어디 있었어?" "이 가방에…." "그러면 가방을 열기는 열었네" 동반자의 안색이 갑자기 확 변한다. 나도 마찬가지였겠다. 휴게소에서 화장실도 가고 핸드폰도 꺼내고 했으니, 가방에 카드가 들었다면 어디선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답답한 마음에 꼬치꼬치 계속 물었더니 갑자기 "아, 생각해 보니 집에서 안 가져온 거 같아." 엥, 갑자기? 그렇다고 더 따져 묻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우린 등산을 시작했다. 이십만 원이나 주고 산 옷을 가리키며 '이 옷 괜찮지 않냐?'라고 자꾸 묻는다. 누가 봐도 병아리가 우장(雨裝)을 걸쳐 입은 느낌 같았건만. '새해 등산을 이어갈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냐'라며 운이 좋단다. '올해 액땜도 다 했다'라면서.

집에 도착하고 카드를 찾아봤지만, 예상대로(?) 없었다. 카드 분실신고를 마쳤다. "아니, 아까는 심각하게 날 조사 하듯이 하더니만 지금은 왜 이렇게 편안하게 이야기해?" "아, 그때는 카드 분실 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어떻게 할지 고민한 거고, 지금은 해결되었으니까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잖아" "만약 누군가가 카드를 사용했으면 어떡해?" "그것도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이젠 괜찮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평범한 일상을 그린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도 변화와 갈등,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불완전한 날들의 연속이다. 지루해 보이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불안한 날들이다.

우리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때론 가혹하리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다. 새삼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 생각난다. '바로 지금',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선행을 베푸는' 삶이야말로 '퍼펙트 데이즈'가 아닐까. 올해는 그 해답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 글쓴이 : 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약력] 현) 가천대학교 겸임교수 / 현) (사)대한바둑협회 임원(이사), 현)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모금분과실행위원회 위원, 서울청 국선세무대리인, 중부청 국세심사위원, 법무법인 율촌(조세그룹 팀장), 행정자치부 지방세정책포럼위원 / 가천대학교 경영학 박사 / 국립세무대학 총동문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