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은 국세청 조직이 아닌 두 개인간의 문제"
세무조사 무마 청탁, 인사 청탁 그리고 거액의 뇌물. 국세청의 추악한 이면을 만천하에 알리게된 계기가 됐던 전군표 前국세청장과 정상곤 前부산지방국세청장이 연루된 사건에 대한 법원의 1차 판결이 나왔다.
그 동안 두 사람에 대한 1심 재판을 도맡아 진행해 온 부산지방법원은 두 사람의 죄를 모두 인정, 중형으로 다스리겠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전 씨는 징역 3년6개월, 정 씨는 징역 4년. 아울러 자신들이 받은 만큼의 돈이 추징금으로(전 씨 7900여만원, 정 씨 1억원)선고됐다.
자신의 죄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전 씨는 즉각 항소심을 제기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법원으로부터 징역형을 경감 받은 정 씨의 항소심 제기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이다.
전 씨가 항소심을 제기할 경우 앞으로 수 개월 동안 이 사건과 관련한 진실공방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진실규명 여부를 떠나 현시점(1심결과)에서 전직 국세청장이 부하직원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인정됐다는 점은 가뜩이나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신뢰를 잃어버린 국세청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 거짓 진술로 점철된 전군표 前국세청장= 확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는 단계지만 부산지법 재판부의 양형이유만 놓고 보면 전군표 前국세청장은 지금껏 '거짓진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재판과정에서 전 씨와 변호인측이 제기한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자료에 대해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확고부동한 정 씨의 진술을 감안할 때 이는 자기정당화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정 씨는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며 "다만 전 씨에게 뇌물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일시와 방문목적 등과 관련한 진술이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금품 제공사실을 의심할 만큼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전 씨 측의 주장처럼 정 씨가 인사상 불만에 따른 복수심에서 검찰과 협상을 통해 조직의 수장이었던 전 씨를 공격했다는 주장도 여러 가지 정황 상 납득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 말미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인용, "내 기억이 '내가 그것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오랜 기간 공직에 근무하면서 정무직 공무원에 오른 전 씨가 인사와 관련해 지방청장으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았다는 사실이 갑자기 세상에 드러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피고인이 강력한 자기 방어기제를 발동, 공소사실을 적극 부인하는 한편 잘못을 제3자에게 투사 또는 전가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 "조직을 방패막이로 삼지 말라(?)"…재판부 일침=전 씨 구속을 전후해 국세청 내부적으로도 비판적 여론이 형성됐던 적이 있다. 전 씨가 '조직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오히려 조직에 부담을 줬다는 비판적 시각이 제기됐던 것.
검찰도 사건 초기 이 사건을 국세청 조직 전반에 걸친 '상납관행'에서 불거진 사건으로 확대해석했다가 국세청 조직의 반발심 등을 고려해(?) '두 사람간의 개인적 사건'으로 치부하는 등 진화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었다.
재판부도 이 사건자체를 국세청 전체 조직의 문제로 비화시키는 것이 아닌 인사권을 쥔 상관과 이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부하직원간의 불미스러운 '금품거래' 문제로 국한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전 씨가 재판과정에서 '재판결과는 (자신의)명예와 국세청, 그리고 이 나라의 명예가 달렸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단지 두 사람(전군표, 정상곤)간의 금품거래에 대한 법적 판단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통해 국세청 내부의 상납관행 등이 증거에 의해 확인된 바가 없는 상황인 점을 감안할 때 이는 국세청 조직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며 "나라의 명예를 운운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했다.
□ 고위 국세공무원의 초라한 뒷모습…착잡한 국세청=이 사건으로 인해 국세청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국세청은 명백한 죄상이 드러난 정 씨는 몰라도 적어도 전 씨만이라도 무죄 결론이 나기를 바랬던 것이 사실.
그러나 이 같은 기대와는 달리 정 씨와 전 씨는 유죄가 확정, 중형이 선고됐다. 두 전직 국세청 고위직 인사들이 중형을 선고받음에 따라 납세자인 국민정서에 미치는 악영향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당초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는 등 전망이 나옴에 따라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던 국세청도 착찹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어느 정도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유죄가 선고되니 착찹한 마음만 든다"며 "다만 재판부가 상납관행 등을 부정한 점은 잘된 판단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세청의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세청이 쇄신을 통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 뿐"이라며 "일반 납세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감안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정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