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쟁력은 정(靜)적인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표적과 같다. 경쟁력의 정의에 관해 국제적인 컨센서스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사방법 또한 꾸준한 조정과 보완을 거듭 중이다.
일반적으로 국가경쟁력은 한 나라 또는 그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국가 또는 그 기업에 비해 보다 많은 부(富)를 창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잣대로 따지면 저임 저가의 풍부한 노동력과 서비스로 고도성장을 구가하는 중국과 인도, 그리고 역동적인 한국 등이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경제로 꼽힐 만도 하다.
그러나 국가경쟁력 랭킹은 단순한 성장게임의 차원을 넘어선다. 지속적인 성장과 장기적 번영을 가능케 하는 정책과 제도 및 제반 요소들을 비교해서 따진다. 경제 사회지표상의 통계적 현실에다 그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기업경영자등 경제주체들의 인식(perception)도 큰 몫을 한다.
복잡한 경제현실을 A매치경기로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매기듯 할 수는 없다. 한국축구는 아시아최강이고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월드컵 4강' 신화에 젖어있지만 FIFA랭킹은 40위권에 머물고 있다.
세계에서 경제회복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찬사가 바깥에서 쏟아진다고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당장 껑충 뛰지는 않는다. 경쟁력랭킹은 서로의 장단점을 비교해 부족하고 잘못된 점은 보완을 유도하는 하나의 노력지표로서 의미가 있다.
지난주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 발표한 2009-2010 국가경쟁력순위는 예년과 달리 몇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을 갖고 있다.
글로벌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세계적 불황기에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첫째다.
글로벌금융위기의 충격이 각 나라의 국가경쟁력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는 이 조사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예상대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필리핀 등 충격이 극심했던 나라들의 순위가 10계단이상 떨어졌다.
선진권 국가 중에서 국가부도위기에 몰렸던 아이슬란드, 그리고 한국이 6계단이나 순위가 떨어졌다. 한국경제의 체질이 대외적 충격에 그만큼 취약하다는 것이 경쟁력 순위로 입증된 것이다.
세계적 불황속에서도 경쟁력 톱 10 나라들은 그대로 톱 10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 둘째다.
WEF는 2년전 부터 조사방법을 바꾸어 일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낮은 나라는 상위랭킹에 들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은 전년의 30위에서 29위로, 인도는 50위에서 49위로, 브라질은 64위에서 56위로 순위가 올랐고, 러시아는 51위에서 63위로 곤두박질쳤다. 'G2'니 ‘친디아(Chindia)’니 ‘브릭스’(BRICs)니 하는 신조어들이 무색하다.
글로벌금융위기를 촉발한 미국은 순위가 1위에서 2위로 한 계단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셋째다.
위기가 진행되면서 미국 금융시장 성숙도는 9위에서 20위로 떨어졌고, 은행건전성은 전체조사대상 133개 국가 가운데 108위, 증시에서 자본조달용이성은 아프리카 짐바브웨보다 순위가 못한 최하위권이다.
그럼에도 경쟁력 2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기업들이 기술혁신과 연구개발을 주도하고, 세계 최상의 대학시스템과 산학협동체제가 생산성과 장기적 번영의 추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상수지적자는 저축보다 투자가 많기 때문이고, 높은 투자율은 미국에 투자하면 그만큼 이익이 많이 난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곧 미국의 경쟁력이라는 설명도 주목을 끈다.
무엇보다 우리의 최대관심사는 한국의 경쟁력이 지난 2년 사이 11위에서 13위로, 다시 13위에서 19위로 무려 8단계나 추락했다는 점이다. 감세와 규제완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정책기조로 내걸고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까지 설치 운영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로서는 실로 당혹스런 일이다.
우리 기업의 생산성과 산업인프라, 거시경제의 안전성, 교육시스템과 왕성한 혁신은 이미 세계수준에 육박하고 있음은 자타가 인정한다. 지난 5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조사에서는 57개국 중 27위로 순위가 전해에 비해 4단계 상승한 바 있다.
게다가 글로벌 금융위기에 단기대응을 잘 해 경제회복이 빠르다고 바깥의 칭찬이 잇따르는 상황이 아닌가. 그럼에도 아시아 네 마리 호랑이 가운데 싱가포르는 3위, 홍콩은 11위, 대만도 12위로 모두 우리보다 먼발치로 앞서고 있다.
WEF의 경쟁력평가는 우리 국가전체시스템에 대한 평가다. 우선 조사대상국가가 133개로 가장 포괄적이다.
경쟁력을 구성하는 12개 요소 중 첫 번째가 제도적 환경이다. 개인과 기업과 정부가 소득과 부를 창출하기위해 상호작용하는 그 국가의 법률적 행정적 틀을 경쟁력평가의 핵심으로 삼는다. 한국은 이들 제도의 질(質)에서 53위였다.
정부정책과 기업경영의 투명성, 정치권 및 사법부 신뢰, 회계 감사 표준과 공정한 게임 룰 확립 등 제도적 환경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은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강성노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졌다'며 특정부문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거나, 설문조사에 주관적 판단이 많이 반영됐다며 객관성과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누워 침 뱉기다.
조사항목의 3분의 2가 설문조사라는 것은 다른 나라 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현실을 경제주체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그 자체가 중요한 지표가 된다. 기업인이나 소비자들에 대한 각종 체감조사도 있지 않는가.
경쟁력순위를 끌어올리는 대책으로 평가항목을 우리 쪽에서 집중관리하고, 평가관계자들에 대한 홍보강화와 함께 국내 패널들의 우호적인 답변을 유도해야한다는 얘기들도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순위는 끌어 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는 국가경쟁력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조사결과가 유리하게 나오면 큰 의미를 부여했다가 불리하게 나오면 신뢰도를 문제 삼는 정신자세야말로 국가경쟁력에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