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논란이 마주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첨단경제도시' 대 '원안 플러스알파' '원안고수'를 놓고 여야 간은 물론 여권 내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간 갈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새해 정국이 한 치 양보도 없는 대격돌을 예고하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 및 여권은 여론의 향배가 판도를 좌우한다고 보고 충청지역 여론설득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공동보조로 이에 맞서며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원안사수'를 위한 대국민 여론전에 올인 했다.
여권 내 친박계는 반대여론 확산에 직접 나서지는 않겠지만 수정안이 국회로 넘어올 경우 신뢰와 원칙이란 당위성을 내세워 반대로 맞선다는 입장이다.
정부와 여권은 신 세종시의 콘셉트가 돈과 사람이 모이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첨단경제도시'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여론에 파고든다는 전략이다.
세종시 원안이 수도를 사실상 분할해 기존의 일부 기능을 단순히 옮겨가는 '과거지향형 나눠먹기 행정도시'개념이라면 수정안은 이명박 식 미래지향형 첨단경제도시라는 주장이다.
반면 야당은 세종시가 대기업특혜도시로 변질되는 것은 물론, 다른 지방으로 가려는 기업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지방경제가 초토화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론전은 피차 명분 쌓기며 여론향배 역시 제 논에 물대기가 십상이다. 충청지역 주민투표나 국민투표로 직접 물어본다면 몰라도 팔이 안으로 굽는 여론조사 몇 번으로 여론이 우리 편이라고 주장한다면 상대방이 승복할 리 없다. 여론몰이 내지 여론을 빙자한 밀어붙이기와 결사항전이 되풀이 될 뿐이다.
무릇 여론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사실 세종시수정안에 실질적으로 제동을 걸 수 있는 세력은 같은 여권 내 친박계 밖에 없다. 이 친박계 부터 설득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바깥의 야권을 설득하고 충청도민과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정운찬 총리는 세종시수정안을 "어제의 잘못을 바로잡고 내일의 토대를 다지는 일"에 비유했다. 당초 세종시는 수도권의 과도한 집중에 따른 부작용을 시정하고 국가균형발전과 국가경쟁력강화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계획됐다.
행정부처 전부를 옮기려했던 당시의 집권세력에 맞서 한나라당이 '9부2처2청 이전'으로 절충해 합의해 준 사항이다. 중앙행정부처의 일부 지방이전은 행정의 불편과 비효율 차원을 넘어선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국가의지의 표명이자 상징이다.
한나라당이 대선 총선 지방선거 대선경선에서 수십 번도 더 확고하게 국민에게 약속했던 사업이다. 정총리는 이를 '과거의 정치적 복선' '정치적 신의 이전의 국가대사'라며 원안대로 행정부처를 옮기면 연간 3-5조원이 낭비된다고 했다.
수도를 분할한 독일의 베를린과 본의 거리는 600km인데 비해 서울과 세종시는 120km, 세종시 오송역에서 서울역까지는 40분 거리로 과천청사에 비해 10분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않는다고 한다.
신뢰 및 정책의 일관성과 효율극대화 중 어느 쪽이 국가백년대계에 더 소중한 가치인가. 신뢰를 지키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큰 효율을 가져온다는 반론도 있다.
행정부처이전 백지화로 국토균형발전이란 세종시의 근본가치는 실종됐다. '내일의 충청발전과 국가발전'으로 얼버무렸고,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국가발전전략측면에서 접근했다고 실무자는 부연 설명했다. 그 결과 세종시는 국가적 사업에서 충청지역 또 하나의 첨단산업도시로 격이 떨어졌다.
그러나 충청지역 여론을 의식해 미래형 첨단경제도시로 키우는 과정에서 특혜시비가 불거지고, 주변 영·호남과 충청의 혁신·기업도시들이 존폐기로에 서게 됐다는 역차별 주장들이 쏟아지면서 국가적 이슈로 다시금 달아오르고 있다.
사실 세종시에 들어선다는 첨단 전략사업들은 세종시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세종시가 아니었으면 다른 지방으로 가든지 수도권에 남아 사업을 펼쳤을 것이다. 기존의 있던 것들이나 계획 중인 것들을 결과적으로 한 곳으로 몰아주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점에서 블랙 홀 얘기도 무리는 아니다.
세종시가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의 중심축이 되면 블랙홀은커녕 그 발전 동력이 인근 지역으로 핵분열효과를 일으켜 국가균형발전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정부 측은 주장한다. 그러나 충청인들에게 속죄하기라도 하듯 첨단산업을 몰아주는 것 자체가 정치논리며 국가 전체적으로 심각한 자원배분의 왜곡이라는 지적도 벌써부터 만만치 않다.
국가균형발전과 경제논리가 뒷전으로 밀린 세종시수정안은 세종시로 인한 갈등보다 더 크고 심각한 갈등을 불러온다는 우려들이 나오고 이 때문에 충청이외 지역민들에게는 차라리 원안대로 가는 게 낫다는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인다.
허허벌판에 인구 50만의 교육과학중심 첨단경제도시를 건설하는 일은 계획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정부는 독일의 드레스덴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삼각연구벨트'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 등을 모델도시로 검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 도시를 건설하고 뛰어난 연구기관과 유수기업을 대내외적으로 유치하려면 경제적 유인 이외에 문화 생활 교육시설들이 잘 갖추어져야한다. 일만 하는 죽은 도시가 아니고, 뿌리 깊은 역사와 문화 예술의 향기, 과학 산업적 토양이 어우러져야 세계수준급 인재들을 모을 수 있다.
현 정부 임기 중에 착공은 할 수 있겠지만 이런 토양은 거의 황무지 수준이다. 5년동안 5조4000억원의 예산이 집행되고 1,550억원의 용역비가 들어간 사업을 2년 만에 백지화시킨 졸속한 준비과정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수정안의 국회처리는 친박계가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 정부의 정면돌파 의지는 확고하고 대기업들의 잇딴 투자계획 발표를 등에 업고 충청민심을 찬성 여론 쪽으로 유도해 친박계를 압박한다는 전략이다.
여론몰이와 친박계 결단 여하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후반기 국정장악력 향배가 가름되는 것은 물론, 박근혜 전 대표와 정운찬 국무총리를 포함한 차기대선주자들의 정치적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
승부가 빨리 가려지지 않을 경우 세종시 논란은 그 밖의 모든 정치 사회 이슈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어 6월 지방선거정국으로 이어질 태세다. 경제위기에서 가까스로 회복국면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무슨 국가적 재앙인가.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