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전략(exit strategy)은 원래 군사작전용어로 '빠지기 전략'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기 전에 체면을 세우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개입작전에서 물러나는 전략이다. 미국의 베트남 철수가 대표적인 출구전략이었다.
근년 들어 미국의 두 '실패한 전쟁'을 놓고 이라크 출구전략, 아프간 출구전략이란 말도 자주 오르내린다.
세계경제위기 이후 각국 정부의 경제 관리(管理) 또한 한 데 뭉뚱그려 출구전략으로 불린다. 경제가 회복되면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행했던 금융 재정상의 각종 비상조치들을 정상상태로 되돌리는 조치다.
정상상태로의 복원을 무슨 탈출 작전처럼 출구전략으로 포장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작의(作意)다. 정부당국이나 중앙은행이 비상조치들을 거두어들인 후 나라경제의 운용에서 완전히 손을 놓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출구전략은 타이밍이 생명이다. 너무 빨라서도 안 되고 너무 늦어서도 안 된다. 시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악재(惡材)로 느끼면 그것은 더 이상 악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출구전략을 시행해야 할 때라고 느낄 때면 이미 출구전략은 시기를 놓친 것으로 간주된다. 치밀한 선제적 대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경기회복과 출구전략은 서로 묘하게 맞물린다. 경기가 회복기미를 보이면 출구전략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출구전략이 시행에 들어가면 시중 유동성 흡수와 금리인상 등으로 경기회복세가 위축된다.
출구전략이 빠르면 유동성 흡수로 시장에 부담을 주고, 출구전략이 늦어지면 경기회복세가 지지부진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기업들 실적 등 펀드멘탈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이 역시 시장에 부담을 준다.
출구전략은 육상경기처럼 출발선상에서 모든 나라가 신호탄소리에 일제히 출발해야 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각기 처한 경제상황과 회복속도에 따라 시장과 부단히 교감하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책메시지를 던지는 운용의 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국이 은행지급준비율을 인상한 지 일주일 만에 미국이 재할인율을 올리는 등 글로벌 출구전략이 본격화하고 있다. 아직 기준금리 인상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른바 미국과 중국 의 G2가 유동성 흡수의 첫 단추를 꿴 것만은 분명하다.
상대적으로 경제가 건실하고 회복속도가 빠른 한국이 왜 출구전략을 미적거리고 있느냐는 바깥의 다그침도 거세어지고 있다.
소비와 투자가 'V'자로 회복되고 공식적인 실업률 등 고용상황도 아시아 국가에서 가장 양호한 한국이 2%대의 초저금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지적들이다.
'현재보다 기준금리를 1%포인트 올려도 인플레를 잡기에 충분하지 않다.' '인상시기를 늦출수록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수준을 지속해 한국경제에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걱정들과 함께 금리인상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권고들이 쏟아진다.
출구전략은 두 갈래다. 금리인하와 양적 완화에 따른 과잉유동성이 경기회복을 타고 인플레이션과 자산버블로 번지지 않도록 막는 금융부문의 출구전략이 그 하나다. 확장적인 재정정책으로 구멍 난 적자재정을 세율인상과 추가세원 발굴, 정부지출축소 등으로 메우는 재정부문의 출구전략이 다른 하나다.
대부분 국가들이 올해에도 재정확대 기조를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예상돼 재정부문 출구전략은 금융부문보다 뒤늦은 내년이후부터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출구전략이 시행되면 어느 정도 경기둔화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더블 딥'에 빠지지 않도록 '신중한 출구전략'을 실시해야한다는 데 세계 각국 간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또 세계경제가 본격 회복되기 위해서는 민간부문 활력이 되살아나야하고, 민간의 회복자생력이 충분할 때 출구전략을 실시하자고 G20 정상회의가 국제공조로 다짐했었다.
일단 미국과 중국이 출구전략에 시동을 건 이상 한국의 출구전략에 관한 논란은 한층 뜨거워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의 재할인율 인상은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밝힌 유동성흡수-기준금리인상-보유자산 매각이라는 3단계 출구전략의 1단계에 해당하며 그 바탕에는 미국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가고 있다는 판단과 함께 위기 때의 비상조치들을 차례로 원래대로 돌릴 태세가 갖춰져 있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깔고 있다.
아직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았으므로 출구전략 발동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은 출구전략이 가진 속성으로 볼 때 억지주장에 가깝다. 올해 5%대 성장률을 내건 한국이 민간의 회복자생력이 아직 미흡하다며 위기상황 때의 기준금리를 계속 유지한다면 세계가 납득할까. 우리정부가 그동안 조기 금리인상불가론의 근거로 내세워 온 글로벌공조와 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설득력 또한 약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의 기준금리 2%는 경제회복속도에 비해 너무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경기가 둔화될 가능성이 높아 당장 금리인상은 쉽지가 않다. 지난해 하반기 회복속도가 빨랐을 때가 금리인상시기로 적격이었는데 시기를 놓친 감이 없지 않다.
인플레보다는 성장과 일자리가 당장의 걱정거리지만 2% 금리를 계속 유지할 경우 경제전반에 거품이 형성되고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등 더 큰 부작용도 예상된다.
정부가 한국은행과 각을 세우면서까지 금리인상에 늑장을 부리는 데는 6월 중간선거 등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한은총재 교체기의 공백까지 겹쳐 한은의 선제적 대응은 꼬리를 내린 상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은에 독립된 중앙은행이 아닌 '정부 도우미(helper)'라는 명예롭지 못한 호칭을 붙였다.
정부에 맞서 선제대응을 포기한 한은의 결정은 앞으로 누가 총재가 되든 한은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올 하반기나 내년 초 인플레가 가시화할 때까지 기다릴 경우 한은은 금리정상화와 통화긴축을 함께 시행해야하는 부담을 안게 되고 이로 인한 급격한 조정은 경제전반에 충격을 줄 우려가 다분하다.
금리조정이 경제에 파급되는 시차를 감안해 단계적 인상의 시그널과 정책메시지를 던지며 시장의 충격을 흡수하고 미리 면역력을 길러주는 치밀한 출구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출구전략의 시동은 한국경제와 시장이 그만큼 튼튼해졌다는 증거이자 자신감의 발로로 대외에 비쳐지는 긍정적인 효과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