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국민의 선택' 이후 국정운영의 기로에 선 청와대가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결과 여권에 대한 견제론이 상당 수준 확인된 만큼 국정운영의 변화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한다.
지난 7일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평소와는 달리 참모들의 의견을 주로 듣기만 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말 수가 확 줄어든 것은 그만큼 생각할 게 많고 고민이 깊어졌다는 의미라는 해석도 따랐다.
이 대통령은 겸허하게 열린 자세로 민심의 흐름을 경청하겠지만 바람에 휘둘려 그때그때 땜질식으로 대처하지 않고 근원적인 종합처방전을 구상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장관과 청와대 수석 몇 명 교체하는 식의 즉자적 변화가 아니라 근원적 성찰을 거쳐 임기 말까지 남은 2년 반 집권 후반기를 관통하는 새로운 국정운영 시스템을 제시할 방침이라고 한다.
어떻든 대통령과 청와대가 뒤늦게나마 불도저식 밀어붙이기를 멈추고 국정운영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재점검하게 된 것은 실로 다행이다. 민의의 선택이 그만큼 놀랍고 무섭고 대견하기만 하다.
문제는 시기다. 국정쇄신은 내용 못지않게 타이밍이 중요하다.
청와대와 내각의 개편은 여권의 개편과 재보선 일정 등을 고려해 7 ․ 28재보선 이후 단행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면전환용 인사는 없다고는 하지만 대통령비서실장이 사의를 표명했고, '세종시 총리'가 표로 호되게 심판받은 상황에서 8월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끌고나간다는 것 자체가 국정운영의 비효율이고 국력의 낭비다.
7월 재보선 결과를 보고 그때 가서도 민심이 돌아서지 않으면 단행하겠다는 식의 버티기 '꼼수'로 비쳐질 수도 있다.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사실상 참패는 MB의 주요정책에 대한 국민의 호된 심판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나라당 한 초선의원(황영철)의 "세종시 문제로 충청이, 4대강 사업으로 종교계가, 대북 문제로 청년층이 이탈했는데 과연 이것을 누가 주도했는가. 정부와 청와대가 주도한 것"이라는 질타가 이를 반증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과 정책을 바꾸는 것은 별개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책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책임을 묻지 않고 정책만 바꾸는 일은 진정한 반성일 수가 없다.
4대강사업은 '뜨거운 감자'다. 야당은 '4대강사업중단'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고, 지방선거이후 민심도 4대강 사업중단에 집중되고 있다. 한 언론사 설문조사에서 앞으로의 주요 정책이슈로 66%가 4대강 사업중단 문제를 꼽을 정도다.
그럼에도 정부는 4대강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이미 20% 가까이 진행돼 중단할 수도 없고 22조원이라는 대규모 예산이 책정된 만큼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추진 중인 국책사업은 선거결과와는 무관하며 민의의 흐름에 따라 기존입장을 쉽게 바꾸는 것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는 볼멘소리도 여권에서 흘러나온다.
4대강사업의 공정률은 현재 15.6%, 보 설치는 31%가 진행된 상태다. 정부는 올해 안에 공정률을 60%로 끌어올리고 내년 말까지 16개보 설치 주요공사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국책 사업이기 때문에 지자체 차원에서 중단시킬 수는 없지만 자치단체에 위임된 업무처리와 관련해 브레이크는 걸 수 있다.
당선된 야권 광역자치단체장들이 협의체를 구성해 사업재검토는 물론 환경영향평가도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고 벼르고 있고, 민주당 측은 "수질 개선 등 기존의 치수사업으로 복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쯤되면 사업의 백지화까지는 못 간다 해도 수정 내지 재검토는 불가피해 보인다.
세종시수정안 역시 밀어붙일 단계는 지났다. 충청권 주민들의 여론이 돌아설 것으로 정부는 줄곧 기대했지만 선거결과는 여론조사상의 민심과는 너무도 달랐다. 법안이 국회에 넘어가 있는 만큼 정치권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출구'를 찾는 지혜가 요구된다.
압도적 표차와 거대여당을 업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첫해 '촛불 위기'에 이어 지방선거 참패라는 참담한 중간평가를 받은 것은 실로 의외다. 야당인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집권여당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MB의 압도적 당선이 반(反)노무현정서의 산물이었고, 다시 반MB정서로 야당이 승리하는 양태가 되풀이 되고 있다. MB가 추진한 정책의 내용도 문제지만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이 공감을 얻지 못하고 많은 국민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다. 국민과의 소통 부재, 한마디로 국민과의 불통(不通)이다.
4대강사업에 대한 반대여론이 드세자 '청계천 복원 때도 반대가 많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도 처음에는 그랬었다'며 이를 무시했다.
수도권의 한 친이(親李)계 의원은 세종시 수정과 관련해 "추진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통감한다. 그런 면에서 '소통'이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의원은 "중요하고 필요한 정책이라도 국민설득과정의 비용을 너무 안들이고 쉽게 밀어붙인 측면이 있다"고 자성했다.
문제는 청와대였고, 여권변화의 핵심은 청와대가 변해야한다는 질타들이 여권 내부에서 쏟아지고 있다. MB는 '촛불정국' 이후인 2008년 10월 13일 이래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격주로 라디오·인터넷연설을 했다. 도대체 그 많은 시간 동안 국민과 무엇을 소통했다는 얘기인가?
당·정·청의 일방적인 소통구조를 개선하고 야당과의 대화, 20-40대 유권자와의 소통창구 확대 등 쏟아져 나오는 쇄신요구는 모두 소통문제로 수렴된다.
앞문을 닫아걸면 뒷문은 슬며시 열어두는 것이 국가의 외교다. 남북관계 또한 MB 임기 중에는 어떠한 접촉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통'(不通)국면에 갇힌 상태다. 경직화된 보수화가 보수정권에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 발목이 잡힌 격이다.
한·미 동맹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한국군에 돌려주기로 국가 간에 합의한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게 다시 가져가 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에서 국격(國格)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미국만 쳐다보는 MB외교가 중국과의 소통에 미치는 악영향도 각별히 유의해야한다. 'MB네오콘(신보수)'으로 둘러싸인 외교안보라인을 재점검해 6자회담재개 국면에 맞추어 남북관계를 복원시키는 출구전략도 고민해야 한다. 중도실용기조는 내치(內治)만이 아니고 외교에서도 실현되어야할 소중한 가치다.
세종시나 4대강사업 등 주요 국정현안들에 대한 반대를 정책의 문제가 아닌 '소통의 문제'로 보고 의견수렴의 통과의례를 거쳐 계획대로 밀고나가려는 유혹은 떨쳐 내야한다.
남은 2년 반을 위해서라면 국정운영기조와 그 운영방식을 함께 바꾸어야한다.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고, MB정권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는 길은 그 길 밖에 없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