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미국에서 6년 만에 광우병 소가 발견되자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이 되살아나면서 4년 전 '광우병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수입중단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격화되자 이명박정부는 미국에 광우병이 추가 발생할 경우 수입을 즉시 중단하겠다고 공언했었다.
약속대로라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즉각 중단하는 것이 도리다. 그러나 MB정부는 검역이나 수입을 중단할 수도, 검역강화만으로 마냥 버틸 수만도 없는 정책적 궁지로 몰리고 있다.
미국 농무부는 지난 24일(현지시각) 캘리포니아 주 중부지방 목장에서 사육된 젖소 중 소 해면상뇌증(BSE), 즉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돼 폐기처분했다고 발표했다.
병에 걸린 소는 10년 7개월 된 젖소이며 동물성 사료에 의한 감염이 아닌 유전자변형 등 비정형 BSE로 전염가능성은 적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한 마리 나왔다고 온 나라가 과잉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나이는 30개월이 넘었다. 국내에는 30개월 초과 소의 수입이 금지돼있다. 젖소는 수입이 허용돼 있지만 식용고기로는 소비되지 않아 수입이 안 된다.
더구나 이번의 경우 다리떨림이나 침흘림 같은 증상이 없고 늙은 소에게 자연발생 또는 돌연변이로 생기는 병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입수된 정보로 미루어 미국의 광우병은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니며, 국민건강과 안전을 위해 검역이나 수입을 중단해야 할 '긴급한'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수입대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할 경우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검역강화-검역중단-수입중단 -유통물량회수 등 4단계가 있다.
광우병이 발생하면 일단 검역을 강화하고 상황을 보아가며 검역이나 수입을 중단하고, 사안이 매우 심각할 경우 유통물량을 회수한다. 검역을 통과하지 못하면 유통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검역중단은 수입중단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정부는 첫 단계 조치인 검역을 대폭 강화하고, 민관합동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해 정확한 발병원인과 감염확산여부 등을 점검한 후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판단에 따라 필요한 조처를 취한다는 입장이다.
검역방식은 30~40kg 단위의 수입쇠고기 묶음가운데 3%정도를 개봉해 뇌와 척수 등 광우병위험부위(SRM)가 포함돼 있지 않은지, 30개월 미만의 소가 맞는지 등을 조사해 왔다. 이 개봉 검사비율을 50%까지 대폭 확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국내 주요 유통매장에서 미국산 쇠고기 판매가 중단되고, 인도네시아에 이어 태국이 수입을 잠정 중단하는 등 소비자 불안은 되레 커지고 있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마저 "검역을 중단하고 최종 분석 결과 조금이라도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고 밝혀지면 수입도 중단해야한다"고 정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민주통합당은 수입중단과 함께 미국과 재협상을 통해 수입위생 조건 강화를 다그치고, 보수단체들마저 국민적 신뢰가 중요하다며 수입·검역 잠정중단을 요구하는 등 정부는 사면초가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중단시키려면 이번 광우병 소 발생을 계기로 국제수역사무국(OIE)이 미국에서 광우병 발생 가능성이 커졌다고 판단해 미국의 광우병 통제등급을 낮춰야 한다.
1998년과 2006년 정부가 미국과 맺은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한국으로의 수출을 중단하고, 수출 재개를 원할 경우 한국 정부와 협의하도록 명시했었다.
그런데 이 규정이 MB정부 초기인 2008년 4월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해 OIE가 미국 광우병 지위 분류에 부정적인 변경을 인정하면 한국 정부는 쇠고기 수입을 중단한다'로 바뀌었다.
미국이 2007년에 '광우병위험통제국' 지위를 획득한데다 '뼈 없는 살코기는 광우병이 발생해도 수입을 중단하면 안 된다'는 OIE 권고를 토대로 미국이 협상을 밀어붙인 결과다. 우리입장에서 굴욕협상 논란을 낳고 있다.
게다가 MB정부는 2008년 '즉시 수입중단'을 약속 한 지 석 달 후 가축전염병예방법을 개정해 광우병이 발생할 경우 '수입을 중단해야 한다'를 '수입을 중단할 수 있다'고 고쳐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발생즉시 수입중단'은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얘기다.
광우병소동이 미국산 쇠고기문제에 대한 낮은 정부신뢰도에서 비롯된다는 분석도 이 때문이다. 약속을 저버리고, 원칙 없는 정부대응이 광우병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사태를 실제 이상으로 악화시켜온 것이다.
검역·수입중단과 통상마찰은 엄밀히 따져 연관이 없다. 가축전염병예방법은 수입위생조건 고시(告示)에 우선하고, 국민건강과 안전을 위해 검역중단을 할 수 있게 돼있다.
지금처럼 광우병 발생경로와 원인이 확실히 규명되지 않는 '긴급한' 상황에서는 우선 잠정적인 수입중단(또는 검역중단) 조치를 취해 국민의 안전부터 도모하고, 충분히 조사해 원인이 밝혀지면 그때 가서 지속적인 수입중단이나 수입재개토록 하는 데 법의 취지가 있다.
조사를 해서 문제가 있는지 확인한 다음 수입중단을 하겠다는 것은 법의 취지를 거꾸로 해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 위생검역 협약 또한 "(회원국) 정부는 타당한 과학적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도 잠정적인 수입중단 조처를 내릴 수 있다"고 돼 있다. 다만 수입중단 조처는 '합리적인 기간'으로 제약되고, 객관적인 위해(危害)성 평가에 필요한 정보를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선(先) 수입중단, 후(後) 조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의지다. 정부는 미국에 파견한 민관역학조사단의 보고서를 받은 뒤 우리와 같은 나라들의 입장을 참고해 합리적 결정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조사단의 광우병농장 방문이 여의치 않고, 젖소의 뇌 조직이 이미 폐기처분되는 등 제대로 된 조사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미국은 연간 약 4만 마리 소에 대해 광우병 검사 샘플 테스트를 실시중이지만 이는 미국에서 도축되는 소의 0.1% 남짓에 불과하다.
샘플테스트의 개체 수가 워낙 적은 데다, 소의 출생에서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력을 기록하는 이력추적제도 미비한 상태다. 우리 쪽 검역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지 역학조사가 미흡하거나 시일을 끌 경우 민심설득 타이밍을 놓칠 우려도 적지 않다.
미국산 쇠고기는 이미 우리 수입쇠고기의 37%를 점하고 있다. 광우병 소는 언제든 발견될 수 있고, 그 때 마다 대응방안을 놓고 온 나라가 놀란 가슴으로 허둥댈 수는 없다. 이번 기회에 수입고시 재검토를 포함해 기민하고 체계적인 대응시스템을 갖춰 놓아야한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