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지하철 안을 왔다갔다 하며 폐지를 줍고 있다.
지하철4호선 서울역 통로에는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허리 굽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함께 승객들이 던져 주는 무가지에 연신 머리를 숙이며 “고맙습니다”를 연발하고 있다.
은퇴준비가 안되긴 노인뿐 아니라 58년 개띠로 상징되는 베이비붐 세대도 마찬가지다.
신림동에 사는 박희수씨(가명 54세)는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계 다국적 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다가 구조조정으로 퇴직한 후 사업을 시작했다.
경험도 없고 물정도 어두운 백면서생인 그가 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머리를 믿고 법무사시험을 2,3년간 공부하였으나 젊은이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 관리원 자리도 저임금을 제시한 노인에게 밀려났다.
이렇게 중산층으로 멀쩡하게 생활하던 이들이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우리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은퇴 후부터 국민연금 수급시까지가 큰 문제
대부분 기업체의 경우 정년이 55세이나 정년퇴직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사오정’이라 하여 40대에 그만 두는 근로자들도 많다.
국민연금의 수급개시 연령이 60세 이후이며 이마저도 점점 늦추어 지고 있어서 ‘40~50대에 퇴직, 60대에 은퇴’라는 불균형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의 소득 없는 기간을 ‘소득 크레바스 기간’ 또는 ‘마의 10년’ 이라 부른다. 이 기간을 슬기롭게 넘기기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급부상하는 장수리스크
인생의 오복 중의 으뜸인 장수도 재정적 뒷받침이나 가족간의 화목이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201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30~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3.3%는 90~100세를 넘겨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고 답했다. 축복이라는 답변은 28.7%에 그쳤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는 의외의 대답이다. 이제는 장수가 리스크인 시대가 된 셈이다.
노부부가 아들 앞으로“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가 하면 부모부양 문제를 두고 형제간에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유명 배우가 홀어머니 간호에 지쳐 아버지 묘소에서 어머니와 함께 동반 자살하기도 하였다.
장수리스크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고독한 것, 직업이 없는 것, 건강이 좋지 않은 것, 재정적으로 곤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돈 없이 오래 사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노후에는 취업이 어렵고 수입이 급격히 줄어드는 반면 지출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아지게 마련이다. 이로 인해 노후를 빈곤하게 보낼 가능성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은퇴 준비, 낙제점…일과 돈이 문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은퇴 준비는 낙제점 수준이다. 특히 은퇴 후 일거리와 재무적인 부문은 더욱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서울대학교 노년·은퇴설계 지원센터와 함께 개발한 ‘삼성생명 은퇴준비지수’를 보면 100점 만점에 일이 51.1점, 재무가 51.5점에 그치면서 가장 저조한 점수를 기록했다.
다른 부문의 준비 역시 여가(56.1점), 마음의 안정(63.9점) 등의 순으로 준비가 부족하긴 마찬가지 였다. 7가지 영역(일, 재무, 여가, 안정, 가족 및 친구, 주거, 건강)을 모두 합한 은퇴준비지수는 58.3점에 그쳤다. 그만큼 은퇴준비가 되지 않았다.
은퇴준비지수를 분석한 결과 은퇴기에 들어선 60대 이상이나 전쟁 세대(1937~1954년 생)의 준비도가 낮게 나왔다. 이 연령대의 경우 앞으로 개선의 여지나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은퇴준비 지수가 높은 층은 연령별로는 40대가, 세대별로는 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4~1974년생)인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준비지수와 관련성이 높은 요인은 건강, 소득, 금융자산 및 총자산이었다. 즉 건강이 좋을수록, 소득과 금융자산 및 총자산이 많을수록 은퇴 준비를 잘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공자는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머지않아 근심이 생긴다(人無遠慮 必有近憂)”고 가르쳤다. 반대로 말하면 멀리 보고 생각하면 근심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지금부터라도 건강관리에 조심하여 질병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없애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억제하여 미래에 대비한다면 한층 여유로운 노후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세로저축에서 가로저축으로 바꾸자
베이비부머 세대는 연령대별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재무목표(결혼자금, 주택자금, 교육자금, 노후자금)를 그때그때 해결하는 방식의 ‘세로저축’에 의존해 왔다.
30대에서 40대까지는 주택을 마련하기 위해 저축을 하거나 대출 받은 자금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용도의 저축을 할 여력이 거의 없었다.
그 뒤로는 자녀가 성장하면서 필요한 교육비 및 결혼자금 마련에 집중했다. 그리고 나니 어느덧 자신의 노후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거주하는 주택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 때문에 노후가 불안정해졌다. 이제는 필요한 자금을 일정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준비하는 세로저축에서 벗어나 보다 효율적으로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가로저축’을 활용해야 할 때이다.
노후자금, 자녀 교육자금, 주택마련자금 등 필요한 자금을 나열하고 저축자금을 동시에 배분해 준비하는 것이 가로저축이다.
생애 전반에 걸쳐 준비해야 할 투자 목적을 빠짐없이 나열한 다음 각각의 목적별로 계획을 세워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단기·중기·장기 목적을 점검한 다음 저축 자금을 배분해 동시에 준비하는 것이 바로 가로저축의 키 포인트이다. 세로저축에 비해 저축 기간이 길어져 보다 효율적으로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각각의 재무 목표별로 자금을 나누어서 장기적으로 적립하는 것이 재산형성에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은 많은 연구결과 입증되어 있다.
‘카페라테 효과’에 맛을 들이자
티끌모아 태산이고 가랑비에 옷 젖는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 값(5,000원)만 아껴서 투자해도 기대수익률 6% 가정 시 30년 후에는 2억 원 가까운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개인연금에 가입하기 위해서 따로 여유자금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실은 하루에 한 잔씩 마시는 커피 값을 절약하는 것만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른 바 ‘카페라테효과’이다.
카페라테 효과는 우리가 마시는 커피에서 유래된 말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을 줄여서 저축을 늘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낭비를 없앰으로서 절약할 수 있는 것이 의외로 많다. 자동차도 한 예다. 우리나라 같이 대중교통이 값싸며 효율적인 곳이 없다고 한다. 굳이 많은 돈을 들여서 자동차를 운행할 필요가 없다.
약 2천만 원짜리 자동차를 운행한다고 가정할 경우 감가상각비용, 보험료, 자동차세, 엔진오일/타이어 교환비용 등으로 한 달에 약 100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 된다. 이 돈만 아껴도 웬만한 연금보험쯤은 납입할 수 있다.
적은 금액도 장기간 굴리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젊을 때 커피 한 잔 값 정도의 소액이라도 장기간 모은다면 노후에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 된다.
소득이 증가하는 만큼 투자액도 늘리자
연금상품에 투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월 일정 금액의 연금을 하나 불입하는 것으로 안심을 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러한 방법은 월 수입이 상승하면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연금투자의 비중이 계속 줄어드는 단점이 있다.
즉 월급으로 300만 원을 받는 직장인이 30만 원을 연금에 투자한다면 처음에는 투자비중이 10%이지만 월급이 400만 원으로 늘어나면 투자비중이 7.5%로 낮아진다.
월급이 불어나 투자 여력이 늘어난데 비해 적은 자금을 연금에 투자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충분한 은퇴 준비를 위해서는 투자 여력이 커진 만큼 실제투자액도 늘리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첫째, 항상 월급 중에서 일정한 비율을 연금에 투자하는 정률법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하자. 적어도 월급의 10%이상을 연금에 투자하면 적정하다.
둘째, 최소 5년마다 연금투자액을 전면적으로 조정하자. 국내 연금상품 중 상당수가 수시로 연금투자액을 증액하기에 불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연금투자액을 늘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품에 가입할 수 밖에 없다. 5년마다 연금투자액을 늘리거나 새로운 상품에 추가로 가입하는 식으로 재조정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자녀 교육에 올인하지 말자
가정의 경제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녀 교육에 과다한 비용을 지출할 경우 빈곤의 악순환이 지속될 수 있는 만큼 사교육비, 해외연수비 등을 줄이거나 없애서 개인연금을 드는 것이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는 첩경이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서민층 자녀들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진출하여 신분상승을 이룬 사례가 많다. 이것이 교육만이 사회적 계급의 사닥다리를 오를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세계 10위로 커짐에 따라 연 경제성장률이 3%대에 머무르고 있고 기업들도 저임금 국가로 생산기지를 옮김에 따라 사정이 달라졌다. 예전같이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고 있다. 취업문이 좁아지자 소위 ‘스펙’을 쌓기 위해 해외연수 등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하지만 1~2년의 해외연수로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는 어렵다.
자녀가 어릴 때 너도나도 예외없이 피아노학원, 미술학원에 태권도 학원을 보내는 식으로 무의미한 ‘스펙 쌓기’에 너무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자녀가 해외에서의 학업을 고집한다면 진퇴양난에 빠질 수 있다. 이제는 노후를 위해서도 교육비를 합리적으로 구조조정 해야 할 시대가 도래 했다.
※ 은퇴의 역사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수렵생활을 하던 시대에는 평생 가족들과 함께 일했다. 일을 그만해도 괜찮을 만큼 충분히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의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일을 했다.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의 공장으로 이동하고 과거의 자급자족적인 생활방식이 상호의존적인 생활방식으로 바뀌었다.
도시의 공장에서는 모든 것이 표준화되고 획일화되었다. 공장에서의 노동은 고되고 빠르고 반복적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작업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산업화 이전처럼 오랜 경험에 따른 지식과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는 사라졌다. 근로자들은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딘 나이 많은 근로자들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게다가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들을 대체할 힘세고 빠른 젊은 근로자들이 풍부하게 공급되었다.
따라서 늙은 근로자를 공장 밖으로 밀어낼 방법이 필요했는데 이런 요구에 의해 고안된 것이 바로 ‘은퇴’라는 아이디어였다. 이후 은퇴는 연금제도가 등장하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공동기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