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읽어봤습니까?"
이게 웬 동문서답일까요. 이 대화는 19대 국회가 개원하고 처음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에서 민주통합당 안민석 의원과 이현동 국세청장이 나눈 것입니다.
안 의원은 마이크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경제민주화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이었지만 이 청장이 동문서답을 하자 "이 책을 읽고 국정감사 때 나오길 바란다"고 주문했었습니다.
이 청장이 이 책을 읽고 이번 국감에 출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의'가 또 다시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바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정의는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발언 때문입니다. 정수장학회에 대한 입장을 밝혔음에도 야당이 계속 공격하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에 야당은 "아버지가 총칼로 빼앗은 재산으로 특혜를 누려놓고 박 후보가 정의를 말하느냐"라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또 역사인식이 비정상적이라는 말도 했는데요.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박 후보가 말하는 '정의'란 무엇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박 후보 입장에서 본다면 정수장학회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공격만 해대는 야당을 보면 정의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대로 박정희 정권 시절, 탄압을 받았던 민주화 운동 세력 쪽에서는 박 후보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온갖 특혜를 누렸고 역사를 역행시켰으니 정의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두 진영의 논리가 몇 십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십년 동안 접근했던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보기로 했습니다. 바로'철학적'인 접근법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안 의원과 이 청장의 에피소드를 얘기한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이에 대한 고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의무만 다하면 되는가. 아니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과거 역사에도 책임을 느껴야 하는가'
이 책을 보면 '과거 잘못 보상하기'라는 소제목 밑에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저자는 미국의 흑인차별을 예로 들었습니다. 과거의 차별을 보상해주기 위해 정부에서 흑인에게 지원을 해준다면 오히려 백인이 역차별을 받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보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느냐'를 가지고 질문을 하는데요. 이 자격 문제는 조금 복잡합니다. 상황에 따라, 개개인에 따라, 혹은 시대적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듭니다. 최근 우리 정치권에서 화두가 되는 '부자증세'입니다.
일부 철학자들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공리(功利)라고 하는데 자유시장경제 논리를 가진 사람들은 이를 반대합니다.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난다고 말입니다.
만약 자유시장경제 논리를 적용한다면 부자들은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사립 헬스시설을 다닐 것이고 자연스레 '내가 왜 세금을 내야돼?'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들이 세금내길 꺼리게 된다면 공립학교나 시립 헬스장 같은 경우는 돈이 모자라 점점 낙후되고 일반 시민들의 삶의 질은 떨어질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시민 삶의 재건을 목표로 하는 공동선(善)을 추구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정치가 상호존중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그냥 모른척하면서 입을 다무는 것은 '가짜 존중'이며 상대방의 얘기에 깊게 개입하는 것이 진짜 존중이자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저자의 논리를 그대로 정수장학회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우선 보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문제를 짚어보겠습니다. 김지태 씨 유족들은 '국민이 납득할 만한 사회 환원'을 요구하고 있으니, 개인 주머니로 재산을 돌려달라는 요구는 아닙니다.
공동선(善)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유족들의 요구는 참으로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수장학회 자체도 자신들이 등록금 지원 등 공동선(善)을 위해 일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진영이 상호존중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진영이 네거티브만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은데요.
일단 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두 진영에서 왜 서로 다른 주장이 나왔는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고, 어느 것이 공동선(善)을 위해 좋은 것인지 고민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심리치료 방법 중에 '사이코 드라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연기하고, 내가 상대방을 연기하면서 당시 몰랐던 감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몇년 전, 미달이로 유명했던 김성은 씨가 어린 나이에 유명세로 주변에서 왕따를 시키고 괴롭혀 자신감이 상실되고 힘들어하자 이 방법을 써 연극 도중 펑펑 운 일도 있었습니다.
여야가 이런 심리극을 해본다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아버지라는 한계를 가진 박 후보와 탄압을 받았던 민주화 세력이 심리극을 해본다면 이유야 어찌됐건 '존중'이라는 첫 발걸음을 떼지 않을까요.
문득 대선후보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