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보리암의 관음보살상
경남 남해의 금산(錦山·681m)은 관음(觀音) 성지(聖地)다. 금산에 있는 보리암(菩提庵)이 동해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 서해 강화도(江華島) 보문사(普門寺)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관음 기도 도량이기 때문이다. 설악산(雪嶽山) 봉정암(鳳頂庵), 팔공산(八公山) 갓바위가 낙산사와 보문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리암은 '톱 3'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그만큼 기도의 효험이 높은 곳이다. 허전하거나 간절할 때 조상의 묘를 찾듯 보리암에 들러 염원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한 가지 소원만큼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
보리암은 대장봉(大將峯) 벼랑 아래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철탑 꼭대기의 까치집처럼 아찔하다. 높은 데 있으니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금산의 전망대와도 같다. 보리암이 자리잡은 터는 금산의 정맥이다. 겉보기에만 위태로울 뿐 절대 흔들림이 없다. 별 넷을 단 대장처럼 위엄과 기상이 넘치는 돌 봉우리다. 대장봉 왼쪽의 용호농주형(龍虎弄珠形) 바위가 대장봉의 정체를 본의 아니게 알리고 말았다. 항시 '스탠바이'하는 이 바위가 부관처럼 암시한 탓이다. 대장이 이곳에 머물고 있음을.
그래도 평범한 남녀에게 보리암의 입지 조건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래서 금산 신령은 깎아지른 보리암벽에 차를 심었다. 이름하여 '암차(巖茶)'다. 보리암 낭떠러지 위에 자라는 차나무에서 딴 차다. 원효, 조선 태조 이성계, 사명대사 등 금산과 인연이 있는 한국사의 스타들이 예외 없이 맛본 차다. 득도와 건국을 도운 차다.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따는 찻잎인지라 암차의 기성(氣性)은 여느 차와 비교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탁월하기만 하다.
보리암과 대장봉을 뭉뚱그리면 선인대좌(仙人大坐)의 형국이다. 천계의 신선이 내려와 남해를 굽어 살피는 꼴이다. 선계와 마찬가지로 보리암은 영원무궁하다. 이승에 구현된 유토피아를 원효 또한 보리암에서 간파했다. 정확히는 휘황한 방광을 봤다. 그래서 이 험한 곳에 보리암을 올렸다.
보리암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가락국 김수로 왕비인 인도의 허황옥 공주가 월지국, 즉 인도에서 배로 실어온 파사석(婆娑石)으로 세운 탑이다. 귀국하면서 배의 바닥에 깔았던 돌이다. 허태후가 인도에서 돌아올 때 풍파가 뱃길을 막았다. 태후는 배에 파사석을 실었고 덕분에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배를 가라앉히는 잡석과는 차원이 다른 돌이다. 파사석으로 만든 보리암 삼층석탑은 그래서 진풍탑(鎭風塔)으로도 통한다. 닭 벼슬의 피를 파사석에 떨어뜨리면 굳지 않는다. 태우면 유황 냄새가 난다. 영기(靈氣)를 잔뜩 머금은 돌이다.
영석(靈石)탑답게 삼층석탑은 과학 상식을 허문다. 실험 삼아 탑의 남서쪽 귀퉁이에 나침반을 놓는다. 바늘은 당연히 남쪽을 가리켜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북쪽을 향한다. 이어 제멋대로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돈다. 탑을 받치는 아래 돌 위에서는 그나마 정상이다. 하지만 위쪽 돌에 올려놓으면 고장이라도 난 듯 나침반은 멈춰선다. 탑 아래로 흐르는 우주의 지기 탓일 수 있다.
대장봉에서 쭉쭉 뻗어 내려온 기의 영향이려니 짐작해도 무방하다. 탑 속에 봉안된 진신사리의 기운이라 해도 좋다. 파사석 자체의 자성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과학 마인드를 자찬할 필요는 없다. 보리암 삼층석탑은 인간에게는 불가사의다. 그러나 관음보살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실수 혹은 조크일 따름이다. 그저 그러려니, 미스터리로 남겨둬야 옳다. 자신의 속눈썹을 볼 수 없다고 속눈썹이 없는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