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판매법 '14일 환불' 규정에 발목잡혀 현장계약 "NO!"
# 업무시간에는 도저히 짬을 낼 수 없는 대기업 과장 신모씨(37). 그는 최근 A 증권사에 직원 방문 신청을 했다. 증권사 포트폴리오 전문가(Private Banker)가 직접 찾아와 계좌 개설, 금융투자상품 추천, 자산 설계까지 해준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PB와 자산 설계 상담을 마친 신 씨는 "금융투자상품 가입은 지점을 내방하셔야 한다"는 안내를 받아 당황스러웠다.
금융당국이 비대면거래 및 직원 방문 계좌 개설을 허용하는 등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실명거래법)'을 완화하며 투자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가운데,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이하 방판법)'이 이에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실명거래법 완화로 '투자 편의' 강화…온라인 신규계좌 개설↑
최근 지점을 직접 방문할 필요 없이 온라인 채널(인터넷, 모바일)을 통해 신규계좌 개설, 자산 관리 상담을 하거나 이를 금융사 직원 방문으로 대체할 수 있어 투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5월 실명거래법의 유권해석을 바꿔 비대면거래를 사실상 허용했다. 이 법의 제3조 제1항은 '금융회사 등은 거래자의 실질명의로 금융거래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존의 유권해석에 따르면 금융사들은 거래자를 직접 대면하는 방식으로 거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18일 금융당국이 이 조항을 '거래자를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을 이용해 실명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석을 바꿨다.
이로써 은행·증권업계에서 온라인 채널을 이용해 계좌 개설을 하는 비대면거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말 기준 20대 고객의 온라인채널 신규 예·적금 비율이 2012년 6월 대비 4.5배 증가했고, 30대와 40대 가입은 약 3배씩 증가했다고 28일 밝혔다. 신한은행은 온라인채널 상품 신규좌수와 잔액증가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은행·증권사 직원이 직접 고객을 찾아가 신규계좌 개설을 하는 방법도 고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된 실명 확인 규제 완화로 올해부터는 은행과 증권사 직원이 태블릿 PC를 들고 고객을 방문해 실명 확인을 하고 신규계좌 개설을 도와준다.
□ 계좌 개설은 온라인·직원 방문으로 가능한데, 금융상품 투자는 안 돼?
하지만 고객의 편리함을 위한 것은 거기까지다. 비대면 혹은 직원 방문 거래는 신규계좌 개설, 투자 포트폴리오 상담에 한정돼 있다.
채권증권, 파생결합증권, 집합투자증권 등 금융상품에의 투자나 종합 자산 관리 서비스를 받기 위한 투자일임·신탁계약 체결을 위해서는 여전히 고객이 직접 지점을 방문해야 하는 실정이다.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사 PB가 고객을 직접 방문하더라도 금융상품에 대해 설명해주고 포트폴리오를 짜주는 등 마케팅만 가능하고, 직접 상품을 그 자리에서 팔 수 있는 외부 영업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한계는 방판법 때문에 생겼다. 방판법 제8조는 '14일 내' 계약철회가 가능토록 명시하고 있고, 이 조항에 금융상품이 포함되면서 증권사의 방문 판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실정이다.
또 이 법 제9조는 '소비자는 제8조 제1항 또는 제3항에 따라 청약철회 등을 한 경우에는 공급받은 재화 등을 반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 조항에 따르면 방문판매로 금융상품이나 금융투자계약을 체결한 후 손실이 생겨 고객이 청약을 철회하면 손실분까지 금융회사에서 물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신 씨가 A 증권사와 증권자투자신탁(펀드)에 1000만원을 납입하는 계약을 체결한 후 손실을 봤다고 가정하자. 신 씨가 손실을 이유로 2주 내 청약을 철회했다면 A증권사는 손실분까지 돌려줘야 한다.
이에 은행 및 증권업계 전문가들은 하루 안에도 가격이 상시적으로 바뀌는 금융투자상품이 방판법 적용대상이 됐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방판법에서 14일 내 금융상품 계약철회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증권사에서는 현실적으로 방문판매로 금융상품을 팔 수 없다"며 "방판을 통해 금융상품을 판매할 수 있으려면 14일을 줄이거나 금융상품을 방판법 적용대상에서 빼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당국에서 실명거래법을 완화해 투자 활성화로 연결지으려 하지만 방판법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며 "바쁜 고객을 직접 찾아가 자산 관리 상담을 해도 그 자리에서 금융상품 가입은 불가능해 어차피 고객은 지점을 찾아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 방판법 일부 개정안 20대 국회에서 통과될까? 업계 '촉각'
이와 관련해 지난 2013년 4월 이종걸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금융투자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은행 및 증권사의 거래를 방판법 거래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방판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이 개정안은 3년간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이 법이 20대 국회에서 통과가 되면 증권사 직원이 태블릿 PC로 현장에서 금융상품 계약을 하고 판매하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증권사 대부분이 아우도어세일즈(ODS) 조직을 꾸리거나 태블릿 PC 기반 방판 모바일 시스템 개발을 마친 상태다. 예대마진 감소로 올 4월부터 일임형 ISA에서 돌파구를 찾는 은행권에서도 방문 판매 바람이 절실하다.
방판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증권사 직원이 보험 직원처럼 태블릿 PC로 주가연계증권(ELS)·파생결합증권(DLS)과 펀드 등 금융상품을 사옥 이외 장소에서 판매, 계약할 수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