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 발등의 불인 조선·해운 구조조정이 시작단계에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채권단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을 통해 12조원을 수혈키로 결정했지만 부실책임을 놓고 채권단은 기업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정부는 채권단의 무능을, 채권단은 정부의 간섭을 탓하며 책임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국회 다수의석을 점하고 있는 야당은 자본 확충에 앞서 부실책임부터 물어야한다며 청문회를 벼르고 있다. 여당의 국회부의장마저 “부실의 공범인 산업은행에게 구조조정을 맡기는 것은 무면허 업자에게 자동차 수리를 맡기는 꼴”이라고 날을 세우고 있다.
정부는 지난 8일 구조조정을 담당할 산업·수출입은행 자본 확충을 위해 정부와 한국은행이 총 12조원을 마련하는 조선·해운 구조조정방안을 확정했다. 정부가 연내 수출입은행에 공기업 주식 등 현물로 1조원을 출자하고, 한은이 10조원, 정부(기업은행)가 1조원을 대출해 11조원 규모의 국책은행 자본확충 펀드를 조성한다는 내용이다.
이같은 지원 조건으로 산업·수출입은행은 인력과 조직을 축소하고 임직원연봉 삭감 등 자구안을 마련 추진토록 했다. 또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 조선3사는 자산매각과 인력감축 등을 통해 16조원의 자금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경영정상화 과정에 투입토록 했다. 구조조정의 컨트롤 타워도 금융위원장이 주재해오던 차관급회의를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장관급회의로 격상시켜 2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키로 했다.
문제는 부실기업처리 때마다 정부가 산은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과연 산은이 이번 조선·해운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할 능력과 자격이 있느냐가 공방의 핵심이다. 대주주와 주채권은행 등으로 부실기업 17개를 떠안고 있는 산은은 구조조정 전문은행으로 불릴 만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회생에 성공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는 역할만 했을 뿐 제대로 된 구조조정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산은에 부실기업을 떠안게 해 문제를 감추다 되레 위기를 더 키워 온 것이 우리 구조조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실기업 주차장'으로 변한 산은부터 구조조정 해야 한다는 애기가 이래서 나온다.
최근 금융감독원과 감사원 감사로 대우조선의 부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와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관리 감독 실패가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하지만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나 산은의 관리 감독 부실은 해당기업과 산은만의 문제를 넘어선다. 정책당국과 정치권, 신용평가와 회계법인을 포함해 우리사회 전반의 총체적 비리구조의 합작품이란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치권과 금융당국은 기업수요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채 무턱대고 20조원 넘는 여신을 제공한 산은의 부실책임을 물은 다음 돈을 투입해도 투입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부실기업에 대한 대규모지원 결정이 금융위원회나 정부 주도로 이뤄진 사실이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부실책임의 화살이 정부와 금융위로 향하고 있다. '비 올 때 우산을 뺏을 수는 없다'며 앞 다퉈 지금지원 압력을 넣던 정치권이 산은과 수은의 부실 관리를 가장 앞장 서 힐난하는 모습도 보기에 우습다.
산은측은 특히 금융위가 산은의 부실 방만 경영을 질타하는 것은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받아친다. 금융위는 산은의 100% 지분을 갖고 있고, 업무계획 승인권은 물론 산은을 감독·명령하고, 임원 해임 등 산은의 모든 것을 금융위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구조다.
대우조선해양과 STX조선 지원결정도 금융위가 주도했다. 따라서 산은이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하지 못했다면 산은의 관리주체인 금융위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산은·수은의 부실이 커진 가장 큰 원인은 지난해 10월 이뤄진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2000억원 지원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금융위원장을 비롯해 기획재정부장관 금융감독원장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한 이른바 '서별관회의'(비공개경제정책협의회)에서 내려졌다. 산은과 수은은 “정부가 시켜서 한 일인데 책임은 우리가 진다”며 볼멘소리다.
1954년 산업은행이 설립된 이래 내부출신이 은행장으로 임명된 것은 단 세 차례뿐, 대부분이 청와대 낙하산으로 채워졌다. 박근혜정부 들어 처음 임명됐던 홍기택 회장은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활동했고, 이동걸 현 회장은 대선 당시 박대통령이 이사로 있던 영남대 교수로 있으면서 박 후보자에 대한 금융인 지지선언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전 정부였던 이명박 정부 시절의 강만수 회장 역시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을 지낸 직후 산은금융지주회장에 선임됐다. 국책은행이 정권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것은 이들 낙하산인사들 때문이며 금융위는 이에 동조하거나 방관하기 일쑤였다.
스스로 낙하산임을 자처한 홍기택 전 회장이 최근 “대우조선 인사권이 없어 대주주 권한만으로 자회사 부실을 알 수 없었다”며 “산은계열사에 보내는 낙하산 인사는 청와대 몫이 3분의 1, 금융당국이 3분의 1, 산은 몫이 3분의1”이라고 '자폭인터뷰'를 했을 정도다.
2008년 이후 새롭게 임명된 대우조선해양의 사외이사 18명중 12명이 정치권 출신 낙하산, 소위 '정피아'였다. 사외이사 자리가 정권의 보은인사로 채워진 것이다. 산은을 문책하려면 이들 '정피아'와 '관피아'를 내려 보낸 '낙하산 본부'의 책임도 물어야한다는 얘기다.
정부가 퇴직관료를 국책은행으로 내려 보내듯 산은 역시 구조조정대상기업에 퇴직자를 내려 보내는 관치관행을 답습해 구조조정 기업에는 '산은 지정석'이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이들 관피아와 정피아들은 구조조정 능력이나 의지도 없이 정치 경제논리 사이에서 눈치만 살피며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오로지 자리보전만을 위해 움직인다.
경영자는 분식회계로 부실을 감추며 거짓흑자로 흥청망청하고, 임직원과 노조는 회사가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격려금 잔치를 벌이고, 감시자 산은은 방만 경영을 알고도 방치하며 배당금만 챙겼다는 감사원 감사결과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구조조정의 원칙부터 실행방안까지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불리는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경제논리대로 문제를 풀어가지 않고 결정을 미루면서 결과적으로 문제를 키워왔다. 국책은행을 동원해 자율협약이나 워크아웃(기업재무개선 작업)으로 시간을 벌려다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치기 일쑤였다.
오늘의 거대 부실덩어리는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와 산은의 무능, 청와대 낙하산과 관피아 정피아 산피아로 이어지는 비리(非理)구조, 폭탄돌리기에 급급한 '서별관회의', 분식회계와 회계부정, 허술한 신용평가 이 모두의 합작품에 다름 아니다.
산업은행은 호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산은만 때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구조조정의 진정한 적은 이 거대한 비리구조다. 기업구조조정에 앞서 이 부실한 구조조정 시스템을 구조개혁 않는 한 조선·해운 구조조정도 또 하나의 실패로 기록될 공산이 커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