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세금체납자와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세관 직원.
한 달 정도 후 인천공항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 될 지도 모른다.
국세청과 관세청이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까지 체납한 고액체납자들의 체납정리를 위해 해외여행을 하고 들어오는 길에 가지고 오는 고가의 물품은 모두 압류하기로 했다.
지난해 법 개정으로 이달부터 시행이 되는 제도이지만 물품 압류 대상이 되는 고액체납자들에게 안내문을 발송하기 위해 한 달 간 유예기간을 둔 후 오는 5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국세청은 매년 1년 이상 국세 3억원 이상(올해 말부터는 2억원 이상) 체납한 사람들에 한해 고액·상습체납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등 일종의 '망신주기'를 통해 체납액 납부를 유도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국세를 가장 많이 체납한 개인은 전 한보철강 대표인 정태수씨로 증여세 등 총 73건, 2225억2700만원을 체납했다. 정 씨가 체납한 세금은 무려 25년 전인 1992년부터 체납한 세금이다.
법인 중 체납 1위는 1위는 삼성금은(대표자 박덕순)으로 부가가치세 등 총 14건, 1239억1300만원을 체납했다. 삼성금은은 14년 전인 2003년부터 세금을 체납해 지금까지 납부하지 않고 있다.
명단이 공개된 고액체납자들의 대부분은 모두 장기간 체납된 사람들이다. 특히 상위 10위에 있는 고액체납자들의 평균 체납기간을 보면 개인은 15.8년, 법인은 13.2년이었다.
사실상 체납액을 납부할 의지가 없는 셈이다.
신무기 등장했지만…빠져나갈 구멍 '수두룩'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알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던 고액체납자 관리감독을 위해 국회가 새로운 방안을 제안했다. 관세청이 해외를 나갔다가 물건을 사가지고 들어오는 고액체납자의 물품을 압류하는 방안이다.
이혜훈 바른정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고액체납자가 해외여행을 하고 국내로 입국할 때 가지고 있는 고가품과 체납자가 수입하려는 수입품, 해외직구 물품 등을 압류해 이를 체납액으로 충당하도록 하는 국세징수법 개정안과 관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일사천리로 국회를 통과했다.
일반 서민들은 만져보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금액의 세금을 체납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해외여행을 하는 고액체납자들은 국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더불어 과세관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이번 제도 시행은 사실상 방치되어 있었던 고액체납자들의 목을 죄는 '신(新) 무기'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과세관청과 외부의 시각은 좀 다르다.
과세관청은 이 제도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반면 외부에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현재도 관세와 부가가치세 등을 피하기 위해 면세한도 600달러를 초과해 사온 물품을 타인에게 맡기거나 숨겨서 들어오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해외직구나 일반 수입품을 숨기기는 더욱 쉽다.
타인 명의로 들여오면 '땡'이다.
관세청도 이런 허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선 인정하고 있다.
김용식 관세청 심사정책국장은 "명의도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지만 수입품이 정말 체납자 본인 것이 아닌지 추적도 병행할 것이다. 그것이 정보분석의 과제"라며 "이것이 참 어려운 난제이고 국세청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휴대품을 제외한 해외직구 특송품이나 일반 수입품은 적발하기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제도의 실효성도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고가라고는 하지만 고작 수백만원 정도의 가방과 시계, 골프채, 보석류 등을 적발해 수억원에서 수천억원까지 되는 체납세액을 충당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풍악은 울렸지만, 실적없으면 어쩌려고..." = 지난 5일 인천세관에서 개최된 '국세체납자 수입품 체납정리 출범식' 현장. 국세청과 관세청이 고액체납자의 체납정리를 위해 공항에서 입국 시 고액체납자가 휴대한 고가 휴대품을 압류하기로 했지만 제도 효과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체납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줄 수는 있지만 수백억원, 수천억원이나 하는 체납액을 가방이나 골프채 등을 압류해 충당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결국 노림수는 '심리적 압박(?)'
국세청과 관세청도 체납자의 여행휴대품 압류가 체납정리를 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리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일정 부분 인정하지만 다른 부문에서 효과를 볼 것이라 자신하고 있다.
체납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느낄 '심리적 압박'이다.
남들이 다 보는 공항에서 "당신은 세금체납자"라는 딱지와 함께 모든 물품을 압류당하는 것 자체가 '망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본 다른 사람들도 '체납을 해선 안 되겠다'는 경각심과 함께 체납자들은 '이런 망신을 안 당하려면 세금을 내야겠다'는 심리적 압박을 느낄 수 있다는 논리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 체납자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경각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성실납세 문화를 조성하는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국세청과 관세청의 입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액체납자들에게 한 달이나 시간을 주고 "체납을 한 당신은 물품 압류 대상"이라고 안내를 하는 것이라고 과세관청은 설명한다. 일각에서는 압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사전안내를 하지 말고 기습적으로 고가의 물품을 압류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과세관청의 목적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김용식 국장은 "징세기관이 국민한테 세금을 걷는 목적으로만 한다면 범죄수사하듯이 압류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하지만 이 제도의 가장 큰 목적은 세금을 체납하면 입출국하기 힘들다는 압박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도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압류 물품으로 체납액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체납자들에게 주는 심리적 압박 효과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만 제도가 효과를 거두려면 적극적인 다른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용민 인천재능대학교 교수는 "해외에서 즐겁게 골프를 치고 와서 골프채를 압류당하면 창피할 것"이라며 "물론 골프채를 다른 곳으로 빼돌릴 수는 있지만 입출국할 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행동에 제약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어떤 제도든지 완벽하게 규제를 하려고 하면 규제에 대한 비용이 높아진다"며 "이렇게 압류하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다"고 밝혔다.
정세은 충남대 교수 역시 "입국할 때 물건을 사서 딴 사람한테 맡길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며 "내가 고액체납자니까 물건을 맡아달라고 말하기가 사실상 쉽지 않다"고 동의했다.
다만 정 교수는 "제도 자체는 심리적 위협을 줄 것이지만 고가의 가방을 하나 빼앗았다고 해서 체납세금을 받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방 하나가 5000만원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라며 "이왕이면 가족이나 일행까지 검색범위에 포함하는 등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해 제도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