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 글·사진/ 책나무 출판사
◆…<사진: 책나무 출판사>
"붉은 장미꽃 향기를 맡고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휘파람을 불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강아지와 노는 법을 배우며 음악을 맛깔스럽게 듣고 꿀 같이 단 낮잠을 잘 수 있다면…"
인생 룰에 대한 어떠한 강요도 없는 '지고(至高)의 자유'가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한다는 가치관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슬로 라이프'가 주목받고 있다. 느림의 미학과 여유의 아름다움을 공감하는 삶은 조급하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수필가 윤영의 두 번째 작품집 '아주 오래 천천히'(2018, 책나무 출판사)는 이름 그대로 쉬어가는 슬로 라이프 산문으로 채워졌다. 솔직하되 가볍지 않고 당당하되 옥타브를 낮출 줄 안다. 무엇보다 천천히 스며드는 진솔한 향기가 좋다.
◆…<사진: 윤영>
저자는 심리적 안정감을 자아내는 글 솜씨를 지녔다. 마치 고향 동네 어딘가를 여유롭게 거니는 것 같은. 정갈하고 재치있는 묘사는 행복한 포만감에 젖게 하며 롱 테이크로 잡아낸 삶의 다양한 풍경들이 긴 여운을 선사한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고 해답이 아닌 공감이 중요한 사람들, 특히 까칠한 현실에 부대껴서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은 이들을 위한 마음의 쉼터가 곳곳에 배치돼 있다.
서두에서 그는 "돌잔치와 결혼식장과 장례식에 다녀왔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은 한 끗 차이더라"라는 근황과 함께 원고를 정리하면서 "유치찬란한 나를 만나기도 했다. 많이 아팠던 날들이 보이기도 했다"는 고백도 전한다. 나이듦에 대해서는 "어쨌거나 중년이라는 건 우리들의 어정쩡한 나이를 반대편에서 자꾸 갉아먹고 들어온다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급속도로 나이가 든다는 식의 요란떨기 없는 조용한 관조와 성찰이 돋보인다.
최근 경계성 종양이라는 진단을 받고 "까짓거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지 않냐"며 꽃새우 먹으러 가는 모습에서는 슬픔과 안도감이 갈마든다. "살아있어 줘 고맙다고, 백수도 좋고 철없어도 좋으니 지금처럼만 살자"는 내륙지방 남자(?)의 속삭임이 달짝지근하다고.
"그러고 보면 인생이 매번 춥고 덥고 배고프고 쓰린 것만은 아니다.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뜨건 맛 찬 맛 품앗이처럼 돌려주고 돌려받으며 오롯이 한 세월을 견뎌왔다. 돌아보니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한때가 또 지나간다"는 토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며 영혼을 추스르는 지혜가 예사롭지 않다.
"어제는 여름, 오늘은 겨울. 교차점도 없이 휑하게 겨울이 왔습니다. 회 빛으로 드리웠던 하늘이 파랗습니다. 제법 가을 분위기라도 낸답시고 도토리도 몇 알 줍고, 쑥부쟁이를 꽂은 지가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데… 사나흘 병원 신세를 지고 보니 일상이 기도되는 단계를 사느라 어지간히 분주합니다. 칼칼한 날에도 우주자연을, 일체인연의 은혜를 사무치게 체감 체득하는 흉내일지라도. 고마운 게 여간 많지 않네요. 오늘도 우체국에 다녀왔습니다. 웅덩이에 푹 삭은 생선 뼈만 남은 나뭇잎 이파리를 골라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고.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썼던 사춘기 시절이 생각나서 가슴이 울컥,시큼, 덜덜하대요. 낯선 단어들이 튀밥처럼 튀어오르더군요. 겨울비가 낭창낭창 내립니다. 이 대낮에 선술집 술 한 잔이 그리운…"
시골 밭에서 뽑은 얼갈이 배추에 따라온 청개구리(크기가 신랑 배꼽만 하다고)와 한참 놀다가 다시 밭에 던져놓고는 "저놈의 고집은 누굴 닮아서… 어찌 저리 말을 안 듣는지 청개구리가 따로 없는기라"고 잔소리하던 생전의 할머니를 떠올린다.
수필을 매개로 한 지극한 그리움의 커뮤니케이션. 책장을 덮으면 왠지 허전하고 오래 정들었던 뭔가가 빠져나가는 듯하다. 어느 날 꽃잎으로 왔다가 눈보라처럼 사라지는 짧은 사랑 같은 느낌이 아니라 잘 발효된 슬로 푸드를 먹은 것 같은 묘한 감상에 젖게 된다.
지난 2005년 '한국수필'로 등단한 저자는 현재 계간 '문장' 편집위원, 대가야신문 '윤영의 문학공간'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에는 대구문인협회에서 주는 '올해의 작품상'을 받았다.
이영철 화가는 추천사에서 "따스하고 애잔한 동화 같은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의 글쓰기는 생명을 향한 사랑과 기도이다. 슬픔보다 더 깊이 내려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희망이 마중나오는 마음 풍경화 같은 산문"이라고 평했다. 224쪽, 1만2,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