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부가가치세 제도 소개
우리나라가 1977년에 부가가치세 제도를 시행한 지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다. 이제는 사업자 간 거래 시 세금계산서를 주고 받는 관행이 정착된 지 오래이고, 소비자가 가격에 부가가치세가 포함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즉, 부가가치세는 우리 생활에 깊이 파고들은 세금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우리보다 더 부가가치세에 익숙한 나라는 아마도 유럽연합(EU)의 회원국들일 것이다. 1954년 프랑스가 전 세계에서 최초로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후 이를 1967년 유럽연합(당시 유럽공동체)이 회원국들의 공통세로 인정하면서 부가가치세제가 유럽에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제는 유럽의 제도를 수입한 것으로, 우리나라 간접세 제도의 빠른 선진화를 위해 유럽의 제도가 좋은 모델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유럽에서 길게는 30여년 전에 도입되어 많은 회원국들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인 연결부가가치세 제도(VAT Grouping)에 대하여 우리나라에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각종 글로벌 기준에 맞추어 사회제도를 개선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법적 형식보다는 경제적 실질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발전하고 있다.
2010년부터 시행되는 법인세 연결납세제도나 2011년부터 적용되는 국제회계기준(K-IFRS, 연결재무제표가 주재무제표임)은 그 좋은 예이다.
이렇듯 기업의 경계선이 하나의 법인에서 단일 경제적 실체로 확대되는 최근 사회제도 개편의 연장선상에서 EU의 연결부가가치세 제도를 소개하고자 한다.
연결부가가치세 제도의 핵심은 간단하다. '법적으로 독립된 납세자들이 재무적 · 경제적 · 조직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그 경제적 단일체를 하나의 부가가치세 납세의무자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여러 계열사로 구성된 단일의 VAT 연결실체에 대하여 연결부가가치세가 적용되면, 각 계열사 간 거래는 부가가치세법상 거래로 보지 않게 된다. 즉, VAT 연결실체를 하나의 회사로 보기 때문에, 계열사 간 거래는 회사 내부의 부서 간 거래와 같이 부가가치세법상으로 무시(disregard)된다. 예를 들어 한 계열사가 타 계열사에게 제공한 전산서비스는 마치 한 회사 내에서 IT부서가 판매부서에 전산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그리고 연결부가가치세제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사업자들이 모두 부가가치세 과세사업자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국가 입장에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세수의 감소는 없게 된다. 부가가치세는 최종소비자가 부담하는 것이고 중간과정의 사업자들은 그 납부만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계열사 간 거래에서 일방에게 부가가치세를 과세한다 하더라도 타방에게는 동액만큼 환급 또는 매입세액 공제를 허용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국가 세수의 크기에는 변동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납세자의 입장에서는 계열사간 거래에 대한 신고 의무가 감소하는 등 절차이행비용(compliance cost)을 상당히 아낄 수 있게 되고, 계열사를 자유로이 통합 또는 분리하더라도 부가가치세 의무에는 변동이 없어 조세 중립성을 확보하는 효과도 나타나게 된다.
더불어 K-IFRS 및 법인세 연결납부제도의 기본 취지와 부합한다는 점과 선진화된 조세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조세행정의 효율성과 납세자의 편의를 제고한다는 점 등의 무형의 장점들도 있다.
또 VAT 연결실체의 부가가치세 납세의무에 대해 각 계열사에게 연대책임을 지우게 하거나, VAT 연결실체 세무조사시 자동적으로 전 계열사의 조사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세수확보 및 징세비용 감소 효과를 얻는 등 세무행정 측면에서도 실질적인 장점을 확보할 수 있다.
연결부가가치세 제도 도입 검토 필요성
2008년 가을부터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로 말미암아 그동안 위세가 당당하던선진국의 투자은행(Investment Banking)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은 채 미국과 유럽정부의 획기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의 금융기관들은 아직도 과거와 같은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세계적 금융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여 오히려 빠른 속도로 경제불황을 극복하고 있어 현재의 상황을 잘만 활용하면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이 세계로 진출하여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우리가 EU의 연결부가가치세 제도를 세심히 살펴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1990년대 이후 서구의 금융산업은 각국의 규제완화와 더불어 전세계적인 시장을 대상으로 급속히 발전하면서 EU의 금융기관들도 고도로 전문화 · 분업화된 시스템인 Universal Banking이나 금융지주회사제도를 도입했는 데 이에 따라 소위 내재 부가가치세 (hidden VAT)가 EU 금융기관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근본적인 요소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그러면 내재 부가가치세 문제란 무엇인가?
EU는 금융기관을 VAT 면세사업자로 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느 한 금융기관 내 일부 부서는 VAT가 과세되는 각종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VAT 과세용역의 내부공급은 과거 기업 내부에서 부서간 서비스 제공에 불과했을 때에는 부가가치세 과세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의 금융기관들은 사업의 효율성과 전문화를 도모하기 위해 각 계열사를 설립, 전문영역을 계열사별로 구분하는 과정에서 내재 부가가치세는 그 심각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각 계열사의 전산부서를 전문화하여 독립시킨 IT 전문계열사는 (전산서비스는 VAT 과세이므로) 전산서비스 대가에 대하여 부가가치세를 납부하게 된다.
만약 다른 계열사들이 과세사업자라면 동액만큼 매입세액공제 또는 환급을 받을 수 있어 금융그룹 전체의 VAT 부담효과는 상쇄되겠지만, 실제로 다른 계열사들은 면세사업자들이므로 매입세액을 공제받을 수 없어 IT 전문계열사가 납부한 부가가치세는 금융그룹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상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조직 분할 또는 구조조정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적인 VAT부담 현상이 바로 내재 부가가치세(hidden VAT) 문제인 것이다.
내재 부가가치세로 인하여 EU의 금융기관들의 경쟁력이 VAT가 없는 지역(미국, 홍콩 등) 또는 VAT 세율이 낮은 지역(일본 등)의 금융기관에 비해 약화되고 있음을 인지한 EU 각국은, 2004년부터 이를 해소할 방안을 본격적으로 강구하고 있는 데 그 유력한 해결방안 중 하나가 바로 연결부가가치세제이다.
연결부가가치세제의 특징 중 하나인 계열사 간 거래의 무시 효과로 인하여 내재 부가가치세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2010년 4월 현재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의 14개국이 이미 연결부가가치세제도를 도입·시행하고 있다.
EU의 부가가치세제를 벤치마킹하여 VAT를 도입한 우리나라 역시 위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겠지만, 그동안 금융기관의 국제경쟁력에 대해 정부나 금융기관 모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재 부가가치세에 대한 문제의식도 희박했고 자연히 연결부가가치세의 도입 필요성도 그리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금융산업 선진화를 2000년에 금융지주회사제도를 도입하였으나, 많은 연구보고서들은 그동안 이 제도가 효과적으로 운용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금융지주회사제의 특징인 분업화 · 전문화가 미비하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비판과 반성을 토대로 최근 정부는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을 개정, 금융지주회사의 업무범위도 확대하여 자회사등에 대한 내부통제 및 위험관리 기능을 업무범위에 추가했다. 아울러 자회사에 대해 공동상품 개발•판매, 상표권 등 지적재산권 등 업무지원 제공을 할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전산 관련업무, 인사, 홍보관리 등 자회사로부터 위탁받은 업무의 구체적 유형도 명시하는 함으로써 금융계열회사간의 시너지 효과를 제고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제시하는 비전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EU가 겪은 내재 부가가치세와 동일한 유형의 문제가 걸림돌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리나라도 EU처럼 금융기관을 VAT 면세사업자로 취급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이 최근 외국으로의 진출을 가속화 하면서 우리 금융기관의 국제경쟁력상 취약성이 더욱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맺는 말
혹자는 우리나라가 과거 사업장 단위별 부가가치세 과세제도에서 사업자 단위별 부가가치세 과세제도로 이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결그룹 단위별 부가가치세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제시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우리의 금융현실을 이해한다면 이는 당면한 경제현상보다는 행정편의에 치우친 주장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만일, 연결 부가가치세 제도를 단기간 내에 전격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어렵다면, 금융산업에 대해서만 연결부가가치세제를 허용하거나(실제로 EU 회원국 중 스웨덴과 핀란드가 그러하다), VAT 연결실체의 요건을 연결 그룹내의 모든 기업들이 K-IFRS를 적용하는 것으로서 법인세 연결납세를 적용받는 그룹으로 한정한다면 운용상 부작용 및 행정적 부담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바야흐로 우리 경제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금융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1990년대 중반에 법인세법에서 구조조정세제 도입의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된 바 있었으나 이에 소극적이었던 정부는 90년대 말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떠밀리듯이 구조조정세제를 급하게 도입한 적이 있다.
지금은 이와 같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의 세제개편을 하기 보다는 선제적으로 변화를 주도하는 세제개혁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