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한·중·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 일본 3국간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논의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급물살을 타고 있다.
"가급적 빨리 협상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총리의 의견 제시로 한중 FTA협상 추진이 탄력을 받자 6년째 협상이 중단된 한일FTA도 협상재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울러 한 중 일 3국을 아우르는 다자간 FTA 추진도 3국 정상들의 공동노력 합의로 속도를 낼 전망이다.
이 같은 모습은 동아시아 3국간 FTA 짝짓기 '신3국지'(新三國誌)를 떠올리게 한다.
천안함 침몰과 관련한 눈앞의 국제공조에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3국 정상들이 FTA체결에는 보라는 듯 모처럼 입을 모은 것이다. 세 나라 정상들은 모이기만 하면 동아시아 3국이 '한 배'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FTA협상은 여태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같은 배를 타기는 했어도 속셈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중·일 정상회담은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 5개국 정상들 모임에 한·중·일 3국 정상이 참가하는 형식으로 1997년 시작됐다. 소위 '아세안 플러스 3' 포맷으로 9차례 만났고, 3국만의 정상회담은 2008년부터 시작돼 일본, 중국(2009년), 그리고 올해의 한국 순서로 열렸다.
한·중·일 3국의 GDP(국내총생산)는 세계전체의 20%에 육박한다. 한국과 일본에게 중국은 미국을 능가하는 최대교역국이다. 각기 양자간 FTA를 체결하고, 이를 동북아 다자간 FTA로 경제공동체를 추구한다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에 필적하는 경제블록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
3국이 지역협력체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때였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아시아 역내(域內)판인 아시아통화기금(AMF)창설 논의로 한 때 탄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위기가 가시면서 흐지부지됐고 구호나 선언에서 맴돌 뿐 좀체 진전이 없었다. 3국간에 역사적으로 묵은 감정과 이해가 얽히면서 친구이면서도 경쟁자이고, 주요 국제문제에서 한 목소리보다는 딴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 FTA 체결 및 경제통합 추구 등을 골자로 한 '3국 협력 비전 2020'이 제시되고 이를 추진할 기구로 3국 협력사무국을 한국에 설치키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비전은 어디까지나 비전이다.
3국의 경제통합은 그야말로 긴 장정(長程)이다. "쉬운 것부터 추진하자"는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말이 이를 상징한다. 한·일 FTA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의 비관세장벽이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문한 것도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이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FTA체결은 단순한 자유무역협정을 넘어 서로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국가 간 전략게임의 양상을 띄어가고 있다. "가급적 빨리 협상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중국 측 제의에 "긴밀히 협력해 나가자"고 한국 측이 화답하자 일본이 다급해지고, 한일 FTA 협상재개를 맡을 실무협의회대표를 격상시키기로 전격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중 FTA체결의 적극 추진은 한미 FTA 의회비준을 미루고 있는 미국에 경고를 발하는 의미도 크다.
'전략적 협력'은 새로운 흐름이다. 중국과 미국과 지난해 워싱턴의 1차 회의에 이어 올해 베이징에서 제2차 '전략 ․ 경제대화'(S&ED)를 가졌다. 베이징대화에서 천안함 미중 공조와 위안화 절상문제에 관해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지만 미국은 중국의 정부조달시장 접근확대, 국유기업개혁 참여기회, 금융정보공유, 주식시장의 개방 확대 등 짭짤한 이득을 챙겨갔다.
대만과 중국은 올해 중 경제협력체제협정(ECFA)을 체결할 예정이다. 금융업을 포함한 500개 주요품목을 협정체결 즉시 대만에 개방하는 방안이 협상중이다.
양안(兩岸)간 전략적 특수성을 업고 일거에 중국 내수시장의 선점을 노리고 있다. 홍콩은 2003년 중국과의 경제협력긴밀화협정(CEPA)으로 중국 서비스산업에 대한 특혜적인 진출권을 확보했고 보충협정을 통해 매년 개방 폭을 넓혀가고 있다. FTA의 틀을 넘어서는 전략적 협력구도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얘기다.
한·중 FTA는 중국이 먼저 제안했었다. 경제적 이익보다는 정치 안보적 목적에서였다. 이에 대해 한국은 중국농산물이 무관세로 밀려들어와 국내농가에 큰 피해를 줄 것으로 우려해 신중한 입장을 취해 왔다. 동북아의 복잡한 지정학적 구도 속에서 한·중 FTA는 한 ․ 미 FTA에 버금가는 전략적 FTA다.
2008년에 합의된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가 수사(修辭)에 그치지 않으려면 FTA로 경제 분야에서부터 물꼬를 터야 한다. 대만이 중국에 수출하는 품목가운데 70%가 한국의 수출품목과 겹친다. 대만과의 경쟁을 위해서라도 한·중 FTA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북·중 특수 관계를 고려할 때 한·중 FTA는 경제적 의미를 넘어선다. 기존의 FTA 틀을 넘어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에 걸맞게 포괄적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장기적인 '전략 ․ 경제대화'로 이끄는 국가적 지혜와 게임전략이 필요하다.
한·일 FTA는 '총론 찬성, 각론 반대'의 입장으로 일관해 왔다. 한국은 일본 제조업 개방에 신중하고 일본은 농수산물 개방과 비관세장벽 해소를 꺼려 2004년 이후 협상이 중단된 상태다.
한국은 일본을, 중국은 한국을 '개구리 건너뛰는 형태'(leaping frog pattern)로 따라잡아 온 결과 비교우위구조가 근접해지고 상호보완성에 따른 무역촉진효과는 갈수록 제한되는 추세다. 특히 한국의 기술향상으로 핵심부품들의 품질과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는 한 대일무역적자는 불가피하다.
FTA체결은 한·일 양국에 단기적으로 모두 고통이지만 단기적 피해에 연연해 중장기 전략적 협력의 타이밍을 놓칠 수는 없다.
미국의 오바마정부는 아시아 태평양전체를 아우르는 일종의 다자간 FTA인 '환태평양파트너십'(TPP)을 미국경제의 새로운 기반으로 삼는 장기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양자간 FTA 체결로 군데군데 확실한 디딤돌을 확보해 놓아야하고, 일본의 경우 장기불황 극복과 구조개혁을 위해 대외적인 돌파구가 절실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TPP를 주창하는 마당에 한·중·일 다자간 FTA가 성사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한중일 3국간에 상호신뢰가 부족하고 중요 이슈에서 충돌이 잦은 현실이 문제다.
최근 미·중 '전략·경제 대화' 개막식에서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은 "교류하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왕치산(王岐山) 부총리는 "대화는 담판이 아니다"라고 강조했고, 이에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길은 달라도 이르는 곳은 같다(殊途同歸·수도동귀)"로 화답했다. 전략적 협력게임은 '전략적 인내'로 풀어가야 한다는 함의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