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지 않는 '행보'-허허실실(虛虛實實) '카리스마'
'권위'로의 회귀 '의구심 해소', 남은 숙제
국세청 역사상 최초의 민간인 출신 수장이었던 백용호 前국세청장(現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7월 퇴임식 자리에서 "나는 한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랬다. 어찌 보면 백 前국세청장은 한 일이 없다. 그가 깔아놓은 것은 국세청 개혁을 위한 '인프라'에 불과하다(?). 요란을 떨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 일이 없다'는 표현을 스스로가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국세청 안팎의 그 누구도 그가 한 일이 전혀 없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가 국세청장으로 있는 동안 국세청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재정역군들이 모여 있는 국세청을 흔드는 지긋지긋한 외풍(外風)도 없었다.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과거 국세청장들도 취임과 동시에 '개혁'을 기치로 내세워 각종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러나 퇴임과 동시에 영속성을 잃고 사라져간 것들이 더 많다. 새로운 것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본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남은 것보다는 사라진 것들이 더 많다.
7일, 이현동 국세청장이 취임 100일을 맞았다. 이현동 국세청장도 지난 100일 동안 한 일이 없다. 그가 한 일은 전임 국세청장이 깔아놓은 개혁 인프라를 고스란히 유지하며, 국세청 조직의 안정적 운영을 추진했을 뿐 대외에 과시하기 위한 일은 특별히 없다.
요란스러움도 철저히 배제됐다. 그가 한 일은 조용하면서도 안정적으로, 국세청 조직이 물 흐르듯 흘러가게끔 방향타를 잡아 준 것이다. 수장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일은 실무진이 하는 것이다. 수장은 일을 잘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국세청장이 한 일은 뚜렷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안정의 추구…"무인사(無人事)가 만사(萬事)"= 이 국세청장은 취임 이후 인사를 단행하지 않았다. 취임 1달 전 이미 지방국세청장을 포함한 고위직, 과장급 인사가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국세청장은 체제를 흔들지 않고 '유지'를 선택했다.
국세청 조직은 인사에 민감한 조직이다. 인사변동이 극심하다. 권력기관의 이미지 때문에 국세청 인사는 특급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국세청장에 오르면서 전임 수장의 흔적을 발빠르게 지워내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그 동안의 패턴이었다.
이 국세청장은 이 부분에서 과거 국세청장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 것만은 분명하다. 조직의 '안정적 운영'이 그가 국세청장으로 간택된 첫 번째 이유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셈이다.
사무관, 서기관 승진인사도 마찬가지다. 전임 국세청장이 만들어 놓은 신(新)인사제도의 틀을 그대로 유지했다. 세부적인 기준에만 변화를 가했을 뿐이다. 취임 전후 흘러나온 "인사제도 등이 과거로 회귀할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은 어느덧 사라졌다.
□ '허허실실(虛虛實實)' 카리스마, 조용한 행보= 이현동 국세청장의 표면적인 이미지에서 웬만해서는 '카리스마'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국세청장과 함께 일해본 국세청 사람들은 표면적 이미지만 가지고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전임 국세청장들이 차갑거나, 매서운 카리스마 그리고 달변으로 대표됐다면 이 국세청장은 허허실실(虛虛實實) 카리스마를 내뿜는 인물이다.
취임 이후 단시간만에 조직을 장악하고 '안정추구'라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국세청을 운영하고 있다는 평가다. 과거의 국세청장들처럼 시간이 지나면 증명될 기회가 분명 오겠지만, 이 국세청장 취임 이후 100일 국세청에는 뚜렷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 역외탈세 세정집중…세원관리 기조변화, 평가는?= 이현동 국세청장은 겉으로 드러난 뚜렷한 족적은 남기고 있지 않지만, 심혈을 기울여 변화를 시도하는 부분은 분명 있다.
역외탈세를 근절하기 위해 세정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그 중 하나. 그는 국세청 차장시절 자신의 직속으로 '역외탈세감시'를 위한 T/F팀을 임시조직으로 운영하더니, 이제는 정상조직으로 탈바꿈시켜 역외탈세 근절을 위한 고삐를 죄고 있다.
또 이미 가시적인 성과도 일부 거두기도 했지만, 내년 예산도 웬만큼 확보해 세금부담 없이 해외로 빼돌린 재산추적을 벼르고 있으며, 외국 국세청과 금융기관들과의 공조를 강화하며 촘촘한 그물망을 펴고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변화는 세원관리의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것. 과거 국세청장들이 '국세청 문턱을 낮추고, 불필요한 세무마찰은 사전에 막는다'는 논리로, 탈세가 의심되는 납세자에 대해서도 혐의사실을 친절하게 안내했던 것이 관행.
그러나 이 국세청장은 이같은 기조를 바꿔, 청장 취임이후 부가가치세 등 신고안내를 하면서 어느 납세자가 불성실신고혐의로 중점관리대상인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
나중에 신고내용을 토대로 불성실신고혐의를 받는 부분을 스스로 시정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지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한 사후관리를 하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선 반론의 여지도 있지만, 아직 평가를 할만한 눈에 띄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이 국세청장은 과거 국세청장들이 늘 입에 달고 살던 '세무조사 유예나 유보' 등에 대한 약속도 상당히 절제하고 있다. 천재지변 등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당초 계획된 일정에 맞춰 원칙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이주성, 전군표 국세청장 이후 한동안 뜸했던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도 조용한 행보로 원칙대로 진행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약속'으로 쌓여만 갔던 장기미조사 법인에 대한 세무조사도 어느 정도 소화하고 있다.
□ 이현동 '스타일' 유지가 '관건'= 이현동 국세청장 취임을 전후해 나왔던 평가는 극과 극. 내부의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지만, 객관성은 다소 떨어진다. 문제는 부정적 평가가 나온 것도 내부에서 흘러나온 것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부정적 평가는 "다시 예전의 권위적인 국세청으로 돌아갈 것이다"로 요약된다. 지난 100일동안 이 같은 평가는 어느 정도 희석이 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말끔하게 해소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즉, 이 같은 부정적 평가를 깨끗하게 해소하는 것이 이 국세청장이 재임기간 동안 풀어야 할 숙제다. 권위는 부패를 낳고 부패는 국세청 조직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사례는 앞서 불명예스럽게 낙마한 국세청장들이 '몸소' 보여줬다.
백용호 前국세청장이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이라는 '편견의 벽'을 부술 연장을 마련했다면, 이 국세청장은 이 연장을 잘 활용해 이 같은 편견의 벽을 완전하게 없앨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과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국세청장이 취임 후 100일이 될 동안 유지해 왔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세부적 측면에서 '세련미'를 가미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이 국세청장마저 실패한다면, 국세청 조직의 이미지 쇄신은 다시 5년, 10년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국세청 조직을 위해서라도, 국민들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 국세청장이 '성공한 국세청장'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다.
